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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철 칼럼] 철도여행의 꿈도 좋지만

등록 2018-06-28 18:46수정 2018-06-29 11:49

북한은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해마다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하는 사회가 될 것임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거죽은 화려하되 속은 썩고 병든 또 하나의 낯익은 괴물 사회가 한반도 북쪽에도 형성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남북이 긴밀한 상호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함께 좋은 사회로 변화·성숙해 갈 수 있을지 모든 사회적 역량을 쏟아 치열하게 숙고·토론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6월12일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두 정상이 직접 만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나눈 얘기가 무엇이건, 회담 직후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았고,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유익한 회담이었다고 기자들에게 거듭 강조했다.

부정적인 눈으로 보면 허풍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라는 문구를 왜 합의문에 써넣지 못했느냐고 물고 늘어지는 기자들의 공격에 트럼프는 오히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중단을 고려하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으로 맞섰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발언은 매우 중요하다. 즉, 북핵문제란 물리적 압박이나 단 한번의 정상회담으로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 긴 시간을 들여 상호 입장을 고려하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임을 미국 대통령이 드디어 터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트럼프는 그에게 적대적인 어떤 정치가, 전문가, 언론인보다 더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들이 주문처럼 외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라는 말은 기실 핵문제 해결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네오콘’이 만든 책략적 용어라는 점은 이미 여러 논자들이 지적했다.

예컨대 ‘불가역적인 비핵화’라는 것 하나만 보더라도, 그것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목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렇게 하자면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나 핵시설뿐만 아니라 미래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핵관련 연구·개발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야 하고, 나아가 원자력발전과 동위원소의 의학적 응용도 전부 단념해야 하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북한의 모든 핵 관련 과학기술자, 그리고 북한 땅에 매장되어 있는 우라늄도 남김없이 채굴하여 미국이나 북한 바깥으로 반출해야 한다. 가당키나 한 일인가?

놀라운 것은, 역대 미국의 어느 정부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이러한 해법을, 종잡을 수 없는 ‘미친’ 언행 때문에 조롱과 비난을 받는 인물이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트럼프의 발언이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중단이 왜 필요한지 말할 때, 그게 돈이 많이 들고, 또 ‘도발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렇다. 즉, 이 훈련은 단지 방어훈련이 아니라 (북한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협적인 군사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고, 따라서 모처럼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이때 그런 훈련을 계속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꼭 노련한 협상가가 아니라도 상대방의 처지를 최소한 이해한다면 누구라도 할 법한 당연한 사고다. 그런데도 트럼프의 이 훈련중단 발언에 대한 서방 주류 언론들의 반응은 심히 냉소적이다.(이는 오랫동안 ‘군산복합체’가 만들어놓은 세계적인 이권구조와 사고습관에서 그들이 벗어나지 못한 탓일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라는 ‘아웃사이더’의 등장은 군산복합체의 쇠락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예외적인 발언이 없지는 않다.

그중 매우 흥미로운 것은 한국 현대사에 정통한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반응이다. 커밍스 교수는 싱가포르 정상회담 직후 어느 시사주간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도발적’이라고 지칭한 미국의 정치지도자는 지금까지 트럼프 이외에는 없었음을 지적하고, 이는 그가 아무런 환상 없이 그냥 ‘맨눈’(innocent eyes)으로, 있는 그대로 사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러고 보면 ‘맨눈’의 소산이라고 함직한 또 하나의 대목이 눈에 띈다. 즉, 트럼프 대통령에게 어떤 기자가 북한 쪽에 왜 인권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듯 묻자 놀랍게도 그 답변은 “뭐라고! 우리는 깨끗하다고 생각하느냐?”였다. 무수한 인종학살, 인권유린을 자행해온 자기들의 역사는 돌아볼 줄 모르는 미국인들의 위선이 통렬히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초기 개척시대 이래 미국의 역사는 일관된 자기몰입의 역사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엘리트 미국인들은 ‘미국 제일주의’에 도취한 나머지 타자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끔찍할 정도로 서툴고 무능한 모습을 드러내왔다. 그런데 그 미국에서도 자아도취 증세가 특히 심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 뜻밖에도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는 역대 어느 정권, 어느 지도자도 하지 못했던 ‘역지사지’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이런 모습은 그가 어떠한 추상적 이데올로기, 사상, 신조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어떤 이상주의적 관념에 의거하여 세상을 바로잡아야겠다는 허황한 소명감 같은 것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드러난 행태를 보면, 그의 심리와 행동은 크게 두 가지 욕망, 즉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키려는 욕망과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에 주로 좌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나아가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중단이라는 과감한 결정까지 나오게 된 배경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트럼프 자신의 두 가지 욕망이 동시에 충족될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어째서 그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말대로, 그것은 어느 대통령도 하지 못했던 것을 성취했다는 희열을 가져다줄 것임에 틀림없다.(그 결과로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것 역시 엄청난 자기만족감을 줄 것이지만, 아마도 트럼프에게는 다른 대통령이 못한 것을 이루어냈다는 자기도취감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접근이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만족감은 그것이 확실히 돈이 된다는 점일 것이다.

트럼프는 북한과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타결되어 북한이 개방사회가 되고,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될 것을 내다보며, 북한의 ‘밝은’ 미래상을 미리 보여주는 영상물을 자신이 만들어 왔고, 그것을 북한의 젊은 지도자에게 보여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북한이라는 미개발 지역에서 자신과 미국의 사업가들이 획득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을 자기도 모르게 표출했다. 그뿐만 아니다. 실제로 실수인지 의도적인지 모르지만, 그는 “북한은 멋진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고, 대규모 휴양시설을 짓고 싶다는 부동산업자의 본심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 동안은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북한과 미국의 관계개선은 이제 거의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지금부터는 지난 70년간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근원적으로 가로막아왔던 냉전구조가 드디어 붕괴하고, 비록 통일은 아닐지라도 남북간 화해, 교류, 협력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라는 새로운 시대 구상도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의 선례에 따라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해마다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하는 사회가 될 것임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거죽은 화려하되 속은 썩고 병든 또 하나의 낯익은 괴물 사회가 한반도 북쪽에도 형성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아니,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경제 논리를 생각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 화해 시대를 맞아 우리는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중국과 러시아로, 그리고 유럽으로 가는 철도여행의 꿈에 취하는 것도 좋지만, 남북이 긴밀한 상호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함께 좋은 사회로 변화·성숙해 갈 수 있을지 모든 사회적 역량을 쏟아 치열하게 숙고·토론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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