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비핵화와 남북, 북-미 화해 움직임은 판 자체를 바꾸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일본 및 중국·러시아 판과 구별되는 한반도 판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점이다. 이 판이 독자적으로 운동할 정도가 되면 미국·일본 판과 중국·러시아 판의 움직임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된다.
강한 한반도 판은 일종의 균형자 구실을 한다. 한-미 동맹 유지를 전제로 하더라도 실제 정책에서는 자율성을 갖고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경로가 나온다. 한반도 판의 움직임이 미국·일본 판과 중국·러시아 판의 위상과 힘에 지속해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독일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했다. 후발국 독일을 강대국으로 진입시킨 주역의 얘기여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국내 정치보다 더 어렵고 변수가 많은 게 국제정치다. 생각과 역량이 다른 여러 주권국가와 글로벌 세력이 각축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튼튼해 보이던 기존 질서가 갑자기 흔들리며 한 지역의 지도 전체가 새로 그려지기도 한다. 지정학을 두고 ‘불가능성의 판구조론(Plate Tectonics)’이라는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지정학은 특정한 지리 환경 속의 국제정치를 말하며, 판구조론은 여러 판으로 나뉜 지구 껍질(지각)의 운동으로 지진을 비롯한 큰 변동이 생긴다는 이론이다.
■ 지진은 일정 기간 이상 힘이 축적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 발생 직전까지는 그 힘의 크기와 방향을 잘 알 수가 없어 대비가 어렵다. 지진이 휩쓸고 간 뒤의 모습도 예상하기 쉽지 않다. 지금의 동북아 상황을 비롯한 지정학적 변동은 이와 닮았다.
이제까지 동북아는 크게 미국·일본·남한 판과 중국·러시아·북한 판으로 짜여 있었다. 비교적 강하게 맞물린 미국·일본 판과 중국·러시아 판에 남한과 북한이 덧붙여진 형태다. 두 개의 큰 판이 가장 심하게 부딪치는 곳이 한반도다.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 북-미 화해 움직임은 판 자체를 바꾸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일본 및 중국·러시아 판과 구별되는 한반도 판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점이다. 이 판이 독자적으로 운동할 정도가 되면 미국·일본 판과 중국·러시아 판의 움직임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된다. 두 판 내부에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지정학에서 모든 판은 영향력 확대와 안정을 지향한다. 판이 아주 강하면 둘은 함께 간다. 그렇지 못하면 둘 다, 또는 둘 중 하나가 손상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선 영향력의 유지·확대와 안정 가운데 한쪽에 집중하는 게 더 현명하다. 지금부터 몇 해 동안이 그런 시기다.
■ 지진이 있더라도 미국과 중국이라는 큰 판이 동북아 지정학의 핵심을 이루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판 구조 속에서 새 관계가 구축될 뿐이다.
두 나라는 지난 수십년 동안 경쟁과 협력을 되풀이해왔다. 1949년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20여년 동안에는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강하게 대립했다. 중국은 미국에 ‘죽의 장막 속의 악마’였고, 미국은 중국에 ‘세계 인민의 적’이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한 데탕트(긴장완화)와 1979년 미-중 수교는 두 나라 관계를 협력 쪽으로 바꿔놓았다. 이후 중국은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해 고도성장을 시작한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해체된 1990년대 초반 이후 두 나라 관계는 경쟁 쪽으로 옮겨간다. 소련이라는 주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미국은 빠른 속도로 커가는 중국을 잠재적인 패권 도전자로 보고 강한 경계심을 나타낸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는다.
다시 상황이 바뀐다. 계기는 2001년 9·11 동시테러와 뒤이은 테러와의 전쟁이다.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이어 이라크 침공까지 밀어붙인 미국은 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중국과 협력하는 쪽으로 돌아선다. 중국 또한 지속적 성장을 위해 대미 관계를 순탄하게 끌고 갈 필요가 있었다.
테러와의 전쟁이 한고비를 넘기고 세계 경제위기(2008년)의 여진이 이어지는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다시 달라진다. 미국은 중국을 패권 도전국으로 인식한다. 2012년 집권한 시진핑 국가주석도 ‘강한 중국’을 공언한다. 2017년 초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는 두 나라의 경쟁 구도를 무역 전쟁으로까지 확산시키고 있다.
수교 이후 두 나라 관계를 보면, 주로 미국의 태도에 따라 대략 10년마다 경쟁과 협력이라는 큰 기조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주된 변수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중국의 지속적인 성장이다. 세계 최대 인구를 가진 중국의 급속한 팽창은 미국에 일정한 선택을 강요한다. 중국과 손잡고 함께 번영하는 길과 중국을 잠재적 위협으로 보고 견제하는 길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한 미국 내 여론은 양분된 상태다.
다른 하나는 중국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미국의 역량과 관련된다. 중국이 위협이라고 하더라도 지구촌 다른 곳에서 시급한 과제가 불거지면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안정시켜야 한다. 1980년대는 냉전의 상대방인 소련·동유럽에 대한 대응이 최우선이었고, 2000년대엔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해야 했다. 지금의 거센 대중국 공세 또한 중동 등 지구촌 다른 곳에서 큰일이 벌어지면 기조가 달라질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미-중 관계를 거꾸로 반영한다. 1980년대엔 미국이 일본을 경쟁자로 인식했으나 90년대엔 미-일 동맹이 한 차원 진전한다. 2010년대에 조정 조짐을 보이던 미-일 관계는 2010년대 들어 군사 일체화를 포함한 글로벌 동맹으로 비약한다.
■ 게다가 2차대전 종전 이후 75년 가깝게 지속돼온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이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핵심축인 미국과 유럽 사이의 대서양 동맹은 회복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훼손됐고,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무역에도 제동이 걸렸다. 그동안 미국이 자랑해온 대표 상표였던 자유민주주의 또한 미국 안팎에서 이른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나 권위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다. 별로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지구촌 70개국, 800개 군사기지에 25만명의 미군이 해외주둔하는 등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막강하며, 금융자본의 힘도 줄지 않았다.
최근의 변화는 상당 부분 트럼프 정부가 자초한 것이지만, 세계가 미국 중심 질서에서 다양한 힘과 원리를 포용하는 다극화 질서로 옮겨가는 현실을 반영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수주의적이고 대중선동적인 시도가 아니더라도, 기존 국제질서를 대체할 새 질서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의 변화는 새 질서의 실마리를 제시할 수 있다.
■ 한반도 비핵화를 가운데에 둔 최근 움직임은 동북아의 새 질서와 미-중 관계에 어떻게 작용할까?
그 열쇠는 한반도 판에 있다. 먼저 비핵화가 실패해 한반도 판 자체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기존의 한·미·일, 북·중·러 판이 유지·강화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장 나쁜 시나리오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마저 있다. 물론 북한이 핵 능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기존 판 구조에 고착된다는 가정 자체가 더는 현실적이지 않다.
한반도 판이 순조롭게 만들어질 경우는 약한 쪽과 강한 쪽으로 나뉜다. 강한 한반도 판은 일종의 균형자 구실을 한다. 한-미 동맹 유지를 전제로 하더라도 실제 정책에서는 자율성을 갖고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경로가 나온다. 한반도 판의 움직임이 미국·일본 판과 중국·러시아 판의 위상과 힘에 지속해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한 구조는 각 판이 서로를 안정시키면서 협력하는 것이다. 일단 협력 체제가 만들어지면 한쪽의 힘이 세지거나 줄더라도 충돌 없이 조정해나갈 수 있다.
한반도 판이 약하면 미-중 관계와 동북아 정세는 불안해지기 쉽다.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판을 자신 쪽에 결합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느낄 것이다. 한반도 안에서도 어느 한쪽과 결합하려는 동력이 계속 분출된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미국과 중국에도 바람직하지 못한 시나리오다.
■ 동북아 지정학의 출발점은 한반도이고, 미-중 관계 조정을 거쳐 다시 한반도에서 일단락된다. 남북 협력이 튼튼하면 미-중 관계도 안정될 가능성이 커지며, 한반도를 통해 미국·일본 판과 중국·러시아 판이 연결돼 동북아 전체가 새로운 공영의 기회를 맞는다.
강한 한반도 판의 형성은 동북아 지정학을 넘어서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그게 바로 새로운 국제질서의 시작이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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