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지성팀 기자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고3 때 수능을 마치고 다녔던 논술학원에서였다. 노란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 남자 강사는 “대학생 때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사면서 마치 계몽주의 시대 사람이 된 것처럼 설다”고 말했다. 대학생이 돼서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철학과)가 번역한 <순수이성비판>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나처럼 <순수이성비판>을 읽어보려 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백 교수가 번역해 2006년 낸 <순수이성비판>은 지금까지 23쇄를 찍어 누적 4만부가 나간 스테디셀러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저작 자체도 어렵지만, 번역도 일반인이 아닌 연구자를 대상으로 해서 어려움을 가중했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최근 통화에서 “나는 대중용이 아니라 학자용으로 번역했다. 대역본을 염두에 둔 완전 직역이다. 독일어 원문의 어문구조를 유지하면서 앞뒷말이 맞게끔 옮기느라 굉장히 고심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인지라 이달부터 한국칸트학회에서 번역해내기 시작한 칸트 전집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학회 전집은 5대 번역 원칙 중 하나를 가독성을 높이는 것으로 정했다. 학회 전집 1차분 3권 중에 <도덕형이상학>이 백 교수의 전집 중 <윤리형이상학>과 겹치는데, 이 둘을 읽어보면 확실히 학회판이 잘 읽힌다. 독일어나 영어 원서 읽기가 어려운 이유는 끝없이 이어지는 복문 때문인데, 학회판에선 복문을 단문으로 적절히 끊어줬다. 일반 학술서 독자들로선 학자들이 더욱 대중을 위한 번역을 해주길 기대한다. 칸트 전집 논쟁을 취재하며 철학을 전공한 표정훈 출판평론가와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그는 “학자들이 뜨악해할 정도로 쉽게 번역을 한 책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예로 든 학자가 하세가와 히로시다. 그는 <정신현상학> 등 헤겔 저작을 전문 용어는 피하고 쉬운 일본어로 번역해 독일 정부에서 주는 상까지 받았다. “즉자적이며 대자적으로”와 같은 용어를 “완전무결한 모습으로”라고 번역하는 식이다. 안타깝게도 학회 칸트 전집 발간 뒤 가독성은 분란의 씨앗이 됐다. 백 교수 쪽에서 학회가 번역의 주체가 되고, ‘정본’ ‘공인’ ‘가독성’이란 표현을 쓴 점 등을 문제 삼아 학회장과 책임연구자의 학회 탈퇴를 요구하고 불이행 시 법적 대응을 경고하고 나서, 칸트 학계가 두쪽으로 갈라지게 생겼다. 어떤 무엇보다 백 교수의 이런 대처가 다른 학회들이 주도적으로 전집 번역에 나서는 걸 꺼리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까 걱정스럽다. 사실 칸트가 “이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 흘러들어왔다가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거물 철학자니, 학자층이 두터워 복수의 전집이 나와서 논쟁이라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헤겔 같은 대형 철학자도 아직 한국어 전집이 없고, 국내 학계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프랑스 철학으로 오면 상황은 더 처참하다. 15권짜리 칸트 전집 번역을 3년 안에 끝내라고 시한을 못 박는 이 부박한 공무원의 나라에선 학회라도 나서야 하지 않을까. 대학들이 수년에서 때론 10년이 넘게 걸리는 번역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아 번역에 나서려는 학자들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은 상황에선 말이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학계 원로인 백 교수가 잘 알 것이다. 후배들이 열악한 조건에서 번역을 하느라 피치 못해 선택한 방식에 몇 가지 단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하는 아량을 보여줬으면 한다.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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