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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가롯 유다

등록 2005-12-05 18:24수정 2005-12-05 18:24

유레카
은화 30냥에 예수를 내다 판 가롯 유다는 배신자를 일컫는 고유명사다. 비열함을 뜻하는 말 앞에는 종종 그의 이름이 붙는다. 유다의 키스는 비수를 감춘 친절한 언행을, 유다 염소는 도살장으로 향하는 가축을 이끄는 동물을 칭한다. 16세기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는 예수의 제자 12명 가운데 유독 유다의 초상을 그리지 않았다. 자신의 신앙과 손을 더럽힐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를 그리면서 귀퉁이에 유다의 모습을 끼워넣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유다를 재해석한다. 스승을 등진 배반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고행을 결심하도록 이끈 조언자로 그려진다. 이 영화에서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정을 통한다. 거센 신성모독 논란을 불렀음은 물론이다. 발터 옌스는 소설 〈유다의 재판〉에서 시복 재판을 통해 유다를 변호한다. 예수를 인간적으로 따랐지만 맹종하지 않고 비판적 관점을 견지했음을 여러 신학적 논거로 전개한다.

사도 베드로 역시 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 도발적인 신학자들은 베드로의 죄질이 유다에 비해 그리 가볍지 않다고 말한다. 유다와 베드로 모두 하느님 앞에 회개했다. 그러나 둘의 운명은 전혀 달랐다. 유다는 배신을 괴로워하다 올리브 나무에 목을 맸지만,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초대 교황이 됐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이 14년 뒤에 작성한 자술서가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됐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수사 때 구타에 못이겨 허위자백을 했고, 절망감을 벗어나지 못해 재판과정에서도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아픈 과거와 심경고백의 진정성을 쉽게 재단할 일은 아니다. 어쩌면 베드로와 유다의 배신과 엇갈린 운명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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