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지역이 중앙에게] 불편과 공포 / 명인(命人)

등록 2018-06-11 18:09수정 2018-06-11 19:24

명인(命人)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남편과 아들이 손수, 한창 우리 가족이 살 집을 짓고 있다. 집터를 구해 기초공사를 하기까지, 계속 서울에 살았다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일에 우리 식구들은 저마다 집에 대한 로망을 늘어놓았다. 에너지를 가장 적게 쓰는 집, 아이들과 부부의 생활에 어느 정도 독립성이 보장되는 집, 시골집의 열린 구조를 위해 현관 대신에 툇마루가 있는 집. 이런저런 토론 끝에 결국 우리 식구들이 어느 정도의 편리함을 포기하고 선택한 것들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발목을 심하게 삐었다. 발목 하나 삐었을 뿐인데, 나이듦에 대하여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발목은 거의 나았는데도 시시때때로 발을 내딛기가 겁이 난다. 울퉁불퉁한 도로는 삐었던 발목을 다시 겹질리게도 하고, 계단을 내려갈 땐 나도 모르게 조심조심 내딛게 된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한다더니 징검다리를 건널 때도 돌이 흔들려서 다시 삐끗하게 되진 않을지 불안해진다.

갑자기 우리가 짓고 있는 집에도 생각이 미친다. 툇마루를 놓기로 한 건 잘한 일일까? 댓돌을 구하는 일도 자연석의 아름다움만 생각했는데 반듯하게 잘린 튼튼한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우리가 처음 집을 설계하면서 우리의 로망을 담기 위해 감수하기로 한 것은 약간의 ‘불편’이었는데, 한두 살 더 먹으니 그 불편은 때로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진다. 새삼 이웃 노인들의 거동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삼 많은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도로, 보도, 계단, 길의 경사, 건물들과 집의 구조, 교통수단…. 장애인들의 이동권과 자립생활권 문제가 아주 구체적으로 내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혀 불편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에 어떤 사람은 불안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조금 불편할 뿐인 일에 어떤 사람은 안전에 대한 공포, 때로는 심지어 생명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

내일은 모처럼 고흥여성모임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이다. 1년이나 여행계를 들고 곗돈을 모으면서 우리는 여행에 대한 저마다의 상상으로 들떴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준비하면서는 여자들끼리의 여행에 우리가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 역시 ‘안전’이었다. 아줌마들끼리의 여행도 이러한데 여성 혼자라면 어떨까?

모처럼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지, 숙소, 교통수단 등 그 모든 것을 계획할 때 가장 먼저 ‘안전’을 고려하는 남성이 있을까? 장거리 고속버스 옆자리에 누가 탔느냐에 따라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안절부절못하는 남성이 있을까? 화장실이 급해 찾아 들어간 공중화장실에서 가장 먼저 ‘몰카’의 위협부터 느끼는 남성은 있을까? 남성화장실과 여성화장실만 있는 그 공중화장실 입구에서 터질 것 같은 방광을 움켜쥐고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는 트랜스젠더에게 그 화장실은 불편일까, 공포일까?

얼마 전엔 노동인권 수업을 하러 갔던 한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우리 센터로 전화가 왔다. 몇 반에서 노동인권 수업을 했던 강사가 수업 중에, 학생의 수업 선택권에 대해서만 말하고 수업받을 책임이나 의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라고 했다. 그리고 강사가 수업 시간에 했던 몇 가지 말을 들어, 그 강사는 다음 학기부터 이 학교에서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외부 강사의 수업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참관을 하러 들어온, 평소에 학생들의 생활 지도를 열정적으로 한다던 그 교사가 비정규직 외부 강사의 수업에서 느낀 것은 불편이었을까, 위협이었을까? 학생들이 학생인권에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대다수 교사들에게 불편일까, 공포일까?

이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지역과 사회는 ‘내 불편과 타자의 두려움을 대하는 감수성과 태도’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일하고 먹고 놀고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마주하는 불편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어떤 불편은 어떻게 감수하고 어떤 불편은 어떻게 성찰하며 살아가야 할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