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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허영에 대하여 / 이명원

등록 2018-05-25 20:26수정 2018-05-25 20:54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자료를 검토하다 보면 어떤 부분에서 인물의 행적과 내면의 결락을 발견할 때가 있다. 역사적 인물의 경우 그의 행적은 다양한 방계자료나 주변인들의 회고나 증언, 공문서 등을 통해 확인하는 게 비교적 용이하다. 그러나 한 시대를 살아갔던 평범한 민중들이나, 혹은 홀연히 역사의 한 장에서 그 중요성을 상실한 인물들의 기록을 확인하는 것은 사실 까다롭다. 게다가 일면적 평가가 어려울 정도의 복잡다단한 삶의 역정을 보여준 인물이라면 이것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영화감독 허영(1908~1952)이 그러한 인물이다. 소설의 캐릭터 유형으로 치자면 허영은 입체적 인물이다. 그는 일제 말기 조선에서 총독부의 국책영화 <너와 나>(1941)를 찍으면서 맹렬한 친일영화인으로 활동하다가, 태평양전쟁 이후로는 인도네시아를 침략한 일본군의 선전반원으로 파견되어 일본의 국책에 순응하는 선전영화를 제작했다, 2차대전 종전 이후에는 조국 귀환을 단념한 것과 동시에, 현지에 남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가했는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곳 영화예술의 초석이 된 인물이다.

복잡다단한 행적 탓이겠지만, 이름도 여럿이었다. 본명은 허영이지만 17살에 일본에 밀항한 이래 그는 히나쓰 에이타로로 살아갔다. 일본에 있던 동포 영화인들조차 그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스스로 출신을 철저히 은폐했다. 첫 결혼 상대 역시 일본 여성이었다. 일본어를 ‘국어’로 알고 성장한 세대였기에 1945년 이후에야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종군 선전반원으로 인도네시아 전선에 파견되어서도 그는 일본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전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이 불붙기 시작하면서 그는 허영이라는 조선 이름을 쓰기 시작하고, 이내 그것은 인도네시아식으로 변용되어 휴융이라는 묘지명으로 종결된다. 허영(조선), 히나쓰 에이타로(일본), 휴융(인도네시아)이라는 이름이야말로 그의 입체적 성격, 다중 정체성을 은유하는 것일 터이다.

한국에서 허영에 대한 연구는 주로 일제 말기 영화사를 연구하는 평론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종원, 이효인, 박명진, 나승희 등의 연구가 그것인데, 국책영화 <너와 나>를 둘러싼 행적과 발언에 대해서는 비교적 명료하게 나타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허영의 전쟁 체험과 종전 그리고 인도네시아 독립 후 그의 행적과 기록에 대해서는 연구가 제한적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에 <적도에 묻히다>(2012)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의 저자인 우쓰미 아이코가 <시네아스트(영화인) 허영의 ‘쇼와’>(1987)에서 허영의 전기적 삶을 복원해내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에는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나승희 같은 연구자는 일본 문단에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등단하고 친일적 문학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 일본으로 귀화, 이후 일본어와 영어로 문학활동을 했던 장혁주와의 유사성을 비교·검토하고 있는데, 허영의 인도네시아 체류 기록과 활동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우쓰미 아이코의 연구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 부분에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첫째, 허영과 같이 해방 이후 조선으로의 귀국을 포기했거나 좌절당해 현지에서 살아갔던 인물들에 대한 탐구가 절실하다. 둘째, 그들의 내면은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다. 행적을 알아도 행위의 내적 동기를 추론하지 못한다면, 역사적 의미화와 가치 판단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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