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박경리는 그가 태어난 <파시>의 통영 산마루에서 한려수도 난바다를 내려다보고, <수적>의 홍성원은 파주 언덕에서 임진과 한강이 합치는 강화 앞바다를 굽어보며, 이청준은 장흥 ‘문학자리’에서 <이어도>로 향해 남해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기아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향해 저세상에서도 바다, 그 ‘자유의 광장’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08년 우리 문단은 뛰어난 세 작가를 잇달아 잃었다. 5월1일 <남과 북>의 작가 홍성원이 문득 눈을 감더니, 그의 장례를 마치자 <토지>의 박경리 선생이 5일 어린이날에 임종했고, 채 석달이 안 된 7월31일에는 <눈길>의 이청준 부음이 날아왔다. 부위는 다르지만 모두 암으로 생명을 앗긴 그 세 작가가 올해 10주기를 맞았다. 그분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 소설 읽기를 피해온 나는 그럼에도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행운에 감사하면서 우리 문학에서 민족사적 서사의 시대도 고비를 다했다는 섭섭함을 되씹는다. 그 후의 우리 소설들은 내밀한 미세 정서로 풍요로워졌지만 이분들이 전개한 역사와 현실에 대한 뜨거운 문학적 재현은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필자와 띠동갑인 박경리 선생은 식민지 교육을 받고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어 당대의 삶을 증언했지만, 무엇보다 3대 50년에 걸친 <토지>의 가족사를 통해 우리 근대사를 재구성하여 한말 이후의 갖가지 기구한 우리 민족사적 삶들을 재현해주었다. 홍성원은 1950년대 3년 동안의 한국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대하소설 <남과 북>으로 고난의 한국 현대사를 추적한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청준은 장편 <당신들의 천국>으로부터 단편 <눈길> 등을 통해 현대와 전통, 자유와 권력 간의 갈등을 해부해 우리 사회의 내면적 괴로움을 추적한 작품들로 존중받아왔다. 그 작품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근대화 진행 과정과 현재적 모순을 다시 꾸려볼 수 있을 정도로 큰 성취를 이룬 세 작가가 같은 해 잇달아 작고한 지 10년이 되는 이제, 나는 문단이나 문학계가 10주기를 맞는 이들의 세계를 글과 행사들로 추모하고 우리 현대문학사의 성과를 다시 평가하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이 사사로이 내게 준 이야기로 그들의 한 면모를 회상하고 싶다. 박경리 선생이 <동아일보>에 장편 <단층>을 연재할 때 자주 원고가 늦어 나는 정릉의 그분 자택으로 달려가 그날치 석간에 실을 글을 받아 와야 할 적이 잦았다. 어느 날 그분은 손자를 등에 업고 어르며 막 마친 원고를 넘겨주면서 하소연을 넘어 절규하듯 외쳤다. “사위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지, 딸은 아침부터 남편 옥바라지하러 일찍 나갔지, 젖먹이 손자는 칭얼대지, 집밖 가까이는 정보원이 지키고 있지, 이웃은 불령인 보듯 눈 돌리고 있지, 그러니 어떻게 원고지를 앞에 놓고….” 그분은 속에서 폭발하듯 원한에 젖은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원성을 높였다. 사위 김지하가 필화를 당해 ‘빨갱이’로 수감중이었고, 기관원은 그의 집을 줄곧 염탐하고 있었으며, 동네 사람들은 못 볼 사람 피하듯 못된 시선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그 사고무친의 고독과 겁박 속에서 그의 <토지>가 창작되었고 그 한스러움이 밴 작품이 국민적 소설이 되어 그의 장례는 민족장으로 보일 만큼 절절하고 간곡했다. 나는 그분의 임종 얼굴을 보면서 그 모습이 한없이 평화롭고 깨끗해 ‘평온 속의 안식’(rest in peace)이란 말의 진의를 여기서 느끼며 감동했다. 홍성원은 여행 때마다 룸메이트로 한방을 쓰고 광화문 거리를 으레 함께 돌아다닌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런 그로부터 그의 가난에 대한 안타까운 회고를 여러 번 들었다. 끼니를 사기 위해 피를 팔기로 작심하고 혹 피가 묽어져 매혈이 안 될까 싶어 고픈 배를 채울 물도 마시기를 참고 병원에 갔는데 너무 피가 진해 간호사가 채혈을 못해 결국 피를 파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 숭인동 셋방에 살 때 부근의 가게에 외상을 너무 많이 져 멀리 동숭동 낙산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 그가 <동아일보> 장편 공모에 작품을 보내고 상당한 자신감을 가졌는데도 통지는 오지 않고 당장의 끼니가 아득해 다방에서 기다리며 아우를 신문사로 보내 확인을 시켰다. 문화부 기자는 대뜸, 그렇잖아도 당선 통지를 보냈는데 반송되어 왔기에 초조해하고 있던 참이라며 반가워했다. 그것이 당시 신문소설에 신풍을 일으킨 <디-데이의 병촌>이었다. 그가 쓴 필명으로 주소지에서 찾으니 그런 사람 없다고 집주인이 반송한 것이다. 그는 그날 당선 통지서를 담보로 다시 외상 쌀을 들여와 끼니를 이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눈길>의 이청준도 굶기를 주제로 한 작품을 썼지만 소년 시절에 겪은 그의 체험은 전율적이었다. 여순 사건이 일어난 후 빨치산이 횡행하던 남도의 시골, 낮에는 경찰이 치안을 맡았지만 밤에는 ‘산사람들’이 내려와 먹을거리를 가져갔다. 어머니와 자고 있는 어느 한밤,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며 전짓불을 비추고 “당신들 어느 쪽이야”라고 호통을 치듯 물었다. 전짓불빛 저편이 어둠으로 가려져 있기에 그들이 경찰인지 빨치산인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한마디 대답이 엇갈리면 목숨이 박살날 순간이었다. 그는 이 삼엄한 장면을 중편 <소문의 벽>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회고하고 있어 그 공포의 순간이 얼마나 깊은 트라우마로 각인되었는지 보여준다. 역시 10년 전에 작고한 하근찬의 <수난 이대>에서 태평양전쟁 때 팔을 잃은 아버지가 6·25로 다리를 잃은 아들을 업고 가는 장면과 함께 이청준의 이 전짓불 장면을 나는 한국전쟁의 가장 ‘뜨거운 상징’으로 보았다. 10년 전의 나는 이 세 분 작가의 잇따른 서거를 문학사적 변화의 예고로, 그래서 우리 현대사의 전환을 알리는 증례로 받아들였다. 이제 거대 서사의 시대는 끝나고 있는 것이다. 박경리는 한국 근대사가 안겨준 운명을 인내의 한으로 버텼고, 홍성원은 시대가 강요한 수난을 완강하게 거부했으며, 이청준은 이 변화들이 얽어준 갈등에 대한 정신적 천착을 보여주던 문학적 소임이 드디어 바뀌고 있음을 그것은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 버팀, 거부, 천착의 양상들은 우리 세대가 더불어 살아온 뜨거운 풍경이었다. 나와 한 살 연상, 연하인 홍성원, 이청준과 12살 위인 박경리가 그 시대적 현실적 고난들을 정시하며 씨름하고 살아온 것이었고 그랬던 작가들과의 작별은 그 고통을 함께해온 우리 역사의 전환을 알리는 징조였다. 그들은 수난의 삶 속에서도 문학인으로서의 도저한 품위와 세상 삶에의 당당함, 오직 글쓰기만의 열정을 고집했다. 그 진정성에 대한 경의가 그들을 향한 그리움과 겹친다. 그 고고한 분들과 한 시대를 함께한 것은 내 생애의 엄숙하면서도 자랑스러운 행운이었다. 욕지도 출신의 ‘평생 기자’ 김성우는 아름다운 단장집 <수평선 너머에서>의 끝 대목에 “바다는 자유의 광장”이며 “나의 자유주의는 바다가 기른 것이고 나의 낭만주의는 수평선이 기른 것”이라고 썼다. 홍성원 묘비에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물 중에서 바다는 가장 단순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한 개의 선과 두 개의 색상이 바다가 만드는 구도의 전부다. 가장 큰 것이 가장 단순해서 바다는 우리를 감동시킨다”고 말한다. 이제 박경리는 그가 태어난 <파시>의 통영 산마루에서 한려수도 난바다를 내려다보고, <수적>(水賊)의 홍성원은 파주 언덕에서 임진과 한강이 합치는 강화 앞바다를 굽어보며, 이청준은 장흥 ‘문학자리’에서 <이어도>로 향해 남해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기아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향해 저세상에서도 바다, 그 ‘자유의 광장’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바다가 표상한 자유, 거기 서린 파토스, 그 사이 설핏 드러나는 영원을 품어들이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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