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디터 10여년 전, 경제부 동료들이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한 기억이 난다. 대학생 2천여명한테 ○○기업 하면 연상되는 옷차림, 체격, 얼굴형, 성격 등을 물은 뒤, 다수가 선택한 이미지로 기업을 의인화한 기사였다. 삼성전자는 ‘근육질 체형에 계란형 얼굴을 한 30대 초반 전문직 남성’, 현대차는 ‘우람한 체격에 사각형 얼굴의 40대 초반 생산직 남성’, 뭐 이런 식이었다. 다소 특이한 건 엘지(LG)였다. ‘훤칠한 키에 패션 감각을 갖춘 30대 초반의 여성 직장인’으로 묘사됐다. 제조 대기업 중 유일하게 여성 이미지가 높게 나왔다. 또 하나 다른 건, ‘일사불란한 삼성맨’ ‘저돌적인 현대맨’처럼 각인된 이미지가 뚜렷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좋게 보면 자유롭고 다양한 기업문화라 할 수 있겠지만, 기업 색깔이 흐릿하다는 건 긍정적 신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제부 기자로 취재할 때, 엘지 경영은 ‘2%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돌이켜보면, 가장 큰 이유는 삼성이라는 존재 탓이 아닐까 싶다. 엘지 역시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뚫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삼성 앞에선 늘 작아졌다. 물론 경영성과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겠지만, 백색가전 등 몇몇 부문을 빼곤 ‘동종업계 라이벌’ 경쟁에서 대부분 삼성에 밀렸다. 삼성은 반도체와 휴대전화 사업으로 약진했고, 금융에서도 은행업을 제외하곤 1등을 차지했다. 엘지는 어떤가. 소심한(?) 판단으로 반도체 인수 기회를 놓쳤고, 피처폰에 매달리다 스마트폰에서 뒤처졌다. 금융은 2000년대 초반 카드 사태 이후 완전히 접었다. ‘2등에 안주하는 기업문화가 있다’는 평가를 인색하다고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이 시기는 구본무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그룹 경영을 이끌 때다. 구 회장은 1995년 엘지 회장직에 올랐고, 이 회장은 1993년 이른바 ‘신경영 선언’과 함께 본격적으로 경영 일선에 나섰다. 아마도 삼성의 ‘비교 우위’는 구 회장의 마음 한쪽에 늘 무거운 숙제처럼 얹혀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탓일까. 고인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나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언론이 전하는 ‘구본무 스토리’는 긍정 평가 일색이고, ‘정도 경영’과 ‘인화 경영’에 대한 상찬이 가득했다. 장자 승계처럼 시대착오적인 전통도 ‘원활한 승계 구도에 도움이 된다’는 온정적 해석이 많았다.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이나 ‘4세 승계’를 비판하는 보도 역시 찾기 힘들었다. 독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겨레>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이웃집 아저씨’ 같은 재벌 총수에 대한 추념이 대부분이다. 구본무 회장에 대한 재발견이랄까,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구 회장의 별세는, 동시대를 산 이건희 삼성 회장을 떠올리게 한다. 과연 이건희 회장은 사후 어떤 평가를 받을까? 사람들은 어떤 기준으로 그의 업적과 생애를 평가할까? 지금의 재벌 그룹 대부분은 ‘이건희 시대’의 ‘삼성 모델’을 쫓아왔다. 삼성 모델이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데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수십억원의 종잣돈으로 수조원대 부를 만들고, 핏줄 승계를 위해 계열사를 자르고 붙이고, 불법이 드러나면 잠깐 물러났다 복귀하기를 반복하는, 이런 비극적 프로세스까지 삼성 모델을 쫓아왔다는 것이다. 20여년 전 시작된 삼성의 경영권 승계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1996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을 시작으로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최근의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분식 논란까지. 이제는 우리 사회와 삼성이 이런 ‘고난의 행군’을 멈출 때도 된 게 아닌가.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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