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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내 마지막 실패 / 신현준

등록 2018-05-11 17:24수정 2018-05-11 18:55

신현준
성공회대학교 교수·여행평론가

몇주 전 나의 남미 여행은 실패로 끝났다. 내 마지막 실패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자전거로 달렸을 때 일어났다. 내 가방을 낚아챈 남자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쏜살같이 사라진 순간,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에 대해 품었던 로망은 증발되고 그 도시와 ‘사랑에 빠질 확률’은 0에 가까워졌다. 차라리 아시아 여행자답게 대륙 최남단 파타고니아에 가서 영화 <해피 투게더>에 나온 장면을 흉내 내는 게 나을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시간 뒤 작은 라이브하우스로 향했다. 이유는 그곳에서 세실리아 강(Cecilia Kang)이 속한 인디밴드 ‘아세시노 델 로망세’(뜻은 ‘낭만자객’쯤 된다)의 공연을 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몇년 전 우연찮게 ‘아르헨티나 한인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그녀에 관한 소식을 접했는데, 큰 기대 없이 소셜미디어로 보낸 메시지가 수신되어 만남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내 마지막 실패>(Mi ?ltimo fracaso)는 세실리아 강의 다큐멘터리 제목이다. 이 영화는 상이한 세대의 세 한인 여성이 일상의 삶에서 다른 한인이나 현지인과 조우하고 접속하는 것을 차분히 묘사하고 있다. 여기 재현된 ‘코레아나 디아스포라’의 삶은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떠도는 고달픈 것도,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멋진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마지막 실패’라는 제목에 대해 ‘왜 하필이면 지구 반대편까지 이민을 왔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는 것은 가장 나쁜 해석 같다. 그건 오히려 ‘앞으로는 실패가 없을 것이다’라는 차분하지만 강인한 다짐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의 여행이 실패라고 평한 것은 엄살이다. 또 한명의 한인 초이(Choi)를 포함한 그곳 지인들 덕분에 학술회의, 출판기념회, 디제잉 파티, 라이브 공연, 미술 전시회 등의 문화 이벤트들을 짧은 시간 동안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이벤트들의 분위기는 유달리 흥건하고 질펀해서, 이 도시가 파리나 바르셀로나 못지않게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곳이라는 인상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아르헨티나는 ‘한때 세계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부국이었지만 포퓰리즘과 군부독재로 실패한 나라’라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다. 역으로 말하면, 한국이 ‘성공으로 인해 행복을 잃어버린 나라’라면 아르헨티나는 ‘실패로 인해 행복을 유지하는 나라’일까. 이 판단이 맞든 틀리든, 한국과 아르헨티나를 비교하는 일은 한국을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와 비교하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그런데 내가 접한 한인들은 특별한 경우일지도 모른다. 그곳 한인 90% 정도는 의류업, 이른바 ‘옷장사’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만난 젊은 한인 하나는 영구이민도 아니고 단기여행도 아니고 ‘여행 왔다가 여기가 좋아서 눌러앉은’ 경우였다. 즉, 그가 그곳에 온 동기는 경제적인 것도,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한국에 사는 게 갑갑해서’였다.

그의 문화적 선택이 마지막 실패가 아니기를 바란다. 오히려 한국에 머물러 살고 있는 걸 마지막 실패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비교’란 것도 국가를 절대적 단위로 생각하는 오래된 습속이 작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게 진짜 나의 마지막 실패이기를!

사족: ‘미 울티모 프라카소’(Mi ?ltimo fracaso)는 트리오 로스 판초스(Trio Los Panchos)가 연주하고 노래해서 유명해진 라틴음악의 고전이고,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나온다. 영화 예고편에는 숙자매의 ‘생각나네’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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