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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김정은과 조현민, 3세들 / 석진환

등록 2018-05-06 22:16수정 2018-05-07 13:20

석진환
사회1에디터

<삼십년에 삼백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교육자이자 작가로 잘 알려진 김진경씨가 1990년대 중반 펴낸 책 제목이다. 시간이 꽤 지나 책 내용이 속속들이 떠오르진 않지만, 대학 때 선배랍시고 새내기 후배들이 입학하면 꼬박꼬박 이 책을 추천했던 기억이 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책에 담긴 저자의 성찰은 막 개강한 봄날 캠퍼스의 가벼움이나 싱그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서구 사회가 300년이란 세월을 거쳐 이룩한 근대화를,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100년 만에 이뤄냈다. 한국은 1960~80년대 불과 30년 만에 이를 압축해 따라잡았다. 30년의 물리적 시간에 300년을 살아낸 사람이, 그리고 그런 사회가 어떻게 정상적일 수 있겠느냐’는 게 저자가 던진 물음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서구 흉내 내기를 하느라 스스로에 대한 성찰은 가능하지도 않았고 필요한 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는 진단이었다.

이후로 나는 오래된 그 책 제목을 떠올리는 순간을 수없이 마주했다. 지하철이 불타고, 철거민의 망루가 불타고, 남대문이 불탔을 때 그랬다. 숱한 의혹에도 ‘부자 아빠’ 이명박 후보가 승승장구할 때, 평생 고된 노동에 시달렸을 백발의 할머니가 박근혜 후보를 부둥켜안고 울 때도 그랬다. 세월호 참사는 그 모든 게 맞물린 결정판이었다.

절망스러운 순간에만 생각났던 그 책 제목을 다시 떠올린 건 최근 뉴스 지면을 뒤덮고 있는 두 ‘3세’ 때문이었다. 이번엔 ‘절망’이 아닌 ‘희망’ 쪽에 가깝다.

‘3세 김정은’은 확실히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다른 ‘인류’였다. 솔직하지만 격식을 갖춘 듯한 그가 마이크를 잡고 오랜 시간 ‘육성’을 들려준 건, 그 자체로 지금까지와 다른 한반도를 예고하는 메시지인 듯했다.

정상회담 뒤 “다음 대통령은 김정은이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미쳐가고 있다”(홍준표)거나 “문재인 대통령은 김일성 사상을 굉장히 존경하는 분”(김문수) 같은 비상식의 언어가 더는 통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한국 사회가 여기까지 오는 데 반백년이 넘게 걸렸다.

‘3세 김정은’이 분단으로 인한 한국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를 끝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면, ‘3세 조현민’은 압축성장에서 비롯된 한국 사회의 ‘재벌 갑질’을 스스로 폭로하는 방식으로 기여했다.

지난 4일 저녁 열린 대한항공 전·현직 직원들의 촛불집회는 500명 수준의 작고 평화로운 집회였지만 그 의미는 절대 작지 않다. 손 맞잡고 연대한 ‘을’들이 ‘갑’에 저항하는 촛불을 든 것 자체로 대한민국은 어제와 다른 사회가 됐다. 대한항공 계열사인 진에어 승무원들이 “불편하고, 건강을 위협하지만, 회사에서 강요하는” 스키니진 유니폼을 고발하는 일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일들이 이제서야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제 갓 시작된 ‘분단’과 ‘재벌 체제’의 미세한 변화에 호들갑 떨 일이 아닌지 모른다. ‘역사에 월반이 없다’는 논리대로라면 2018년 한국 사회는 여전히 60년에 330년을 살아낸 ‘괴물’일 수 있다. 장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전쟁 같은 일터가 널려 있고, 속도와 결과가 모든 걸 지배하는 압축성장의 논리가 곳곳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더라도 ‘부자가 3대를 못 간다’는 옛사람들의 혜안에 인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한 ‘수구·재벌’의 기득권이 이제 3대째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과 조현민은 이런 기득권 구조에 균열이 나고 있음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두 ‘3세’가 휘몰아온 ‘의미있는’ 변화를 격하게 환영하며, 머지않아 나타날 또 다른 ‘3세들’을 간절히 기다려 본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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