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지성팀 기자 “언니, 작은아빠가 곧 전쟁 날 거라고, 내일 아침에 신도림역 앞 버스정류장에 피난 갈 버스를 보내준대.” 2년 전, 아내가 결혼하기 전에 처제와 함께 살 때다. 연이은 북한 핵실험으로 긴장이 높아진 어느 날, 처제가 아내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놀란 아내는 주변 친구들 여럿에게 연락을 돌린 뒤, 부모님에게 전화하고 나서야 자기가 속아 넘어간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군인이라 쉽게 속아 넘어간 거 같기는 했지만, 난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뻥에 속아 넘어가냐고 아내를 놀렸다. 우린 1년 전 결혼했는데, 아내는 그 뒤에도 북-미 갈등이 격화되면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1월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자기 핵 단추가 더 크다며 설전을 벌이던 때였다. 아내는 비상용 생존배낭이라도 사야 하는 것 아니냐고, 곧 전쟁이 난다는 소식을 들으면 빨리 외국으로 도망가자고 했다. 나는 “김정은이 자기 죽을 일을 왜 하겠냐”고 달랬지만, 사실 그때 나도 꽤 불안했다. 트럼프라는 예측불가능한 사람이 잘못된 판단으로 한반도를 다시 전쟁의 참화 속으로 밀어 넣지 않을까 걱정했다. 내가 살면서 전쟁의 위협을 가장 크게 느낀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모두 그 이후 이야기를 안다. 지난 2월 평창겨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남북관계가 급반전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4월27일 감격스러운 남북정상회담에 이르렀다. 두 정상은 판문점 선언에서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한다”고 시기를 못박아, 드디어 올해 남북은 65년간 이어진 한국전쟁을 끝내게 됐다. 남북정상회담 이튿날 아침부터 페이스북엔 <한겨레>의 표지를 찍어서 올린 사진이 눈에 많이 띄었다. 1면과 24면 두 개 면에 걸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 사진을 싣는 파격적인 편집이 화제가 됐다. 여러 표지 인증샷 중에서도 특히 부모들이 자기 키만한 <한겨레>를 들고 있는 아이들을 찍은 사진이 눈에 띄었다. 처음엔 재미있는 인증샷으로만 생각하다가 비슷한 사진을 서너장 더 볼 때쯤, 이 사진들만큼 판문점 선언의 의미를 한 번에 보여주는 사진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선언으로 이제 이 아이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전쟁 불안으로 떨지 않아도 되겠구나, 더는 이 나라에서 피란민으로 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사회학자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그의 대표작 <전쟁과 사회>에서 한국 사회를 ‘피난사회’로 정의했다. 그는 여기선 모든 사람이 피난지에서 만난 관계처럼 서로를 대하며 질서와 원칙보다 당장의 이익 추구와 목숨 보전에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매일 차를 운전하는 도로 위, 장사가 잘되면 월세를 올려 자영업자를 내쫓는 건물주, 세월호에서 피난사회를 목격해왔다. 특히 박근혜-최순실 정권,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냉전수구세력들은 안보·경제 불안을 부추겨 사람들을 정신적 피란 상태에 묶어두고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로 챙길 수 있게 한 분단 체제가 사라질세라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하지만 판문점 선언이 약속한 대로 올해 전쟁이 끝난다면 이제 우리는 더는 피란민이 아니다. 앞으로 남북의 정상들이 미·중 등 강대국을 설득해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해 씨름할 때, 우리 시민들이 할 일은 이 지긋지긋한 피난사회와 냉전수구세력을 청산하고 ‘사람이 먼저’인 품위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일 거다.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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