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법인 진실의힘 상임이사 한반도 남쪽 끝 진도 지막리, 벌포 바다를 바라보며 누워 있는 무덤이 있다. 1924년 진도에서 태어나 2010년 잠든 이수례의 무덤이다. 그의 삶은 고단했던 분단과 냉전의 폭력시대, 그 맨얼굴을 보여준다. 그는 진도 사람 박영준과 결혼해서 해방둥이 첫아들을 낳았다. 겹경사였다. 곧 서울로 옮겨와 남편은 제강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역사의 격랑은 평온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졌다. 모두들 혼비백산, 봇짐을 꾸렸다. 남편은 뒤따라가겠다며 먼저 떠나라고 했다. 이수례는 올망졸망 세 아이를 데리고 전쟁의 한복판을 걷고 걸었다. 한달 넘도록 걸어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 갓난아기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두 아들은 번듯하게 자라 취직도 하고 손주들도 낳았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1981년 3월7일 새벽.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내들은 다짜고짜 이수례를 차에 태웠다. 남산 안기부의 수사관들이었다. 그들은 남편이 진도로 찾아와 동침도 하고, 아들을 데리고 북한도 다녀오고, 일가친지도 만났다는 허위자백을 강요했다. 밤낮없는 매질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옆방에서 들려오는 두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지옥이었다. 68일의 고문 수사는 행방불명된 남편을 간첩으로 되살려 놓았고, 이수례의 일가족을 20년 넘도록 진도에서 암약한 고정간첩단으로 조작하기에 충분했다.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판결은 안기부 조서 그대로였다. 냉전과 분단의 법적 실체인 국가보안법은 이수례와 일가족을 고정간첩단으로 손쉽게 조작했다. 이수례는 감옥에서 환갑을 맞고 4년을 꼬박 채운 뒤 출소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간첩’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그에게 눈길 한번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길로 절에 가서 찬모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했다. 큰아들 동운이는 18년 만에 풀려났지만, 감옥 안이나 밖이나 다를 바 없었다. 부모 원망 한번 없는 아들을 볼 때마다 이수례의 마음속에는 강물이 흘렀다. 아비 없이 자란 것도 서러울 텐데, 다섯살 때 헤어져 얼굴조차 기억 못 하는 아버지 때문에 간첩으로 조작된 아들들. 고통과 슬픔의 세월이 흘렀다. 민주정부가 세워지고 천신만고 끝에 열린 재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났다. 이수례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작은 새 같은 몸으로 병상에 누워 ‘무죄’ 소식을 들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을 옭아맨 세상과 작별했다. 아들들은 볕 좋은 곳에 어머니 무덤을 만들었다. 곁에는 종이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눕혔다. 하얀 저고리, 푸른 바지, 하얀 고무신. 육신도 유골도 없어서 종이로 만든 남편의 형상이었다. 이수례는 죽어서야 남편을 곁에 둘 수 있었다. 분단은 가진 것 없고, 빽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쟁 통에 생이별한 남편은 ‘행방불명자’로 처리됐다. 살아서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서슬 퍼런 시대를 거치면서 두려움으로 변해갔고 군부독재는 돌아오지도 않은 남편을 끄집어내서 이수례와 아들들을 간첩으로 조작했다. 분단에 기댄 국가폭력의 칼날은 이수례의 온몸을 관통했다. 남북 정상이 드디어 판문점에서 만났다. 극적인 반전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역사적인 회담은 분단의 시대에 으깨지고 사라져간 희생자들의 고통과 저항에 발 딛고 서 있다. 이수례, 그리고 수많은 ‘이수례들’의 눈물과 통한을 위로하는 데서 분단의 어두운 장막은 걷히기 시작할 것이다. 평화의 봄은 이수례의 무덤에 진혼곡으로 울려 퍼질 수 있을 것인가. 1주일 뒤면 이수례의 기일이다. 진도 지막리 그의 무덤에는 겨울을 견뎌낸 봄꽃들이 흐드러질 것이다.
이슈한반도 평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