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3월께 남조선과도입법위원 위원장으로 선출된 우사 김규식이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아카이브
해방 공간에서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우사 김규식(1881~1950)과 몽양 여운형(1886~1947)은 흔히 ‘중간파’로 불렸다. 그렇다고 이들이 택한 길이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은 한반도의 남과 북에 주둔한 미군과 소련군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했고, 정치적 이념은 서로 달랐지만 단독정부 수립이 불러올 전쟁의 비극을 막기 위해 끊임없는 대화와 타협의 길에 온몸을 던졌다.
지난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와 우사김규식연구회는 ‘1948년 남북협상과 한반도의 미래’ 제목의 학술회의를 열었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중재 구실을 맡았던 미군정 소속 레너드 버치 중위의 기록을 통해 김규식의 정치적 구상을 조명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발표문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1948년 2월12일 버치는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남북 지도자 회담’을 앞두고 이승만과 김규식이 나눈 대화를 이렇게 기록했다. “이승만은 만약 이 회담이 실패하면 한 지역에서의 선거 정책을 지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첫번째 기회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노력들은 철저하게 외세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 협상은 끝내 실패했고, 그 결과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과 기나긴 냉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김규식의 말처럼, 그것은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첫번째 기회였을 뿐이다. “외세의 개입 없는” 남북 대화에 대한 요구는 한국 현대사에 스민 하나의 정신으로서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2000년 기어코 첫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그리고 2018년 4월27일, 분단과 민족상잔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판문점에서 또다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이것 역시 마지막 기회일 리는 없다.
최원형 책지성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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