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미투 운동 이후 한국 사회가 급격히 변해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거친 저항이 있지만, 이번만큼은 바꿔보겠다는 절박한 의지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변화를 기대해봄직하다. 하지만 의미있는 성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 있다. 직장 내 성희롱이나 권력형 성폭력은 조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 곳곳에서 조직적 대응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한 것은 일단 환영할 만하다. 그들이 앞다투어 약속하는 것 중 하나가 성희롱·성폭력 전담기구 설치다. 그런데 어떤 조직이든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처리할 기구와 절차를 이미 가지고 있다. 사내 고충처리 부서도 있고 감찰 부서도 있다. 아예 성희롱·성폭력 전담 부서를 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새로 무언가를 만들겠다고 하기 전에 기존 기구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이유를 규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기구들이 유명무실해진 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비밀을 보장하고 문제를 처리해준다는 신뢰가 없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사건처리기구들은 조직 내 그 누구의 지휘나 간섭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공공기관과 회사에 이런저런 고충처리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지만, 이러한 의미의 독립성을 갖추고 신뢰를 받고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 각국의 조사·연구에 따르면, 사건처리기구 이외에도 피해자 상담·조언, 제도 개선 건의, 일상적 홍보나 조직문화 개선 활동 등을 담당할 사람을 조직 구성원 중에서 임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여 악화일로로 치닫는 것을 막으려면 초기 단계에서 마음 편하게 상담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동료들을 조직적으로 양성하라는 것이다. 요즘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미퍼스트’(Me First)나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연대하겠다는 ‘위드유’(With You)를 실천하려는 흐름이 있는데, 이를 제도적으로 지원하자는 취지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미 우리 법은 ‘성희롱 고충 담당자’(양성평등기본법)와 ‘명예고용평등감독관’(남녀고용평등법)이 비슷한 역할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실망스럽다. 담당자가 임명조차 안 되어 있거나, 임명된 사람이 적절한 교육훈련을 받지 않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구성원들이 담당자가 누군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유의미한 제도를 만들어 놓고 그 내용이 채워지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정은 성희롱 예방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성희롱 예방교육 의무화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강력한 제도화다. 하지만 그 강력한 제도만큼 강력한 효과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담당자를 임명하라”, “교육을 실시하라”는 법적 명령을 현장에서 실현할 인적·물적 자원이 충분히 투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연일 거물급 인사들의 성희롱·성폭력 사건들이 폭로되고 수사를 받는 장면들이 나온다. 철저하게 수사하고 엄벌에 처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런데 어떻게든 결과가 나오는 ‘사건’과 달리, 조직적 차원에서 마련된 대책들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성패를 측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니 그럴듯한 대책이 마련되어도 구체적 성과로 이어질 때까지 지속적인 관심이 이어지지 못한다. 규범과 제도들이 무기력해져도 방치되어왔던 이유다. 껍데기만 앙상하게 남지 않게 하려면 정말 집요하고 끈질기게 내용을 채워나가야 한다. 진정한 변화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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