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능감에는 ‘내용’과 ‘방향’이 없다. 효능감의 내용을 채우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비판과 성찰이라는, 효능감 낮은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 작업이 무시되는 순간, 사회는 효능감 게임의 지옥이 된다. ‘축제와 탈진의 반복’을 넘어서 어떻게 더 나은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사회비평가 정치 효능감이란 말을 종종 본다. “촛불시위가 사람들의 정치 효능감을 높였다”는 식이다. 2016년 <한겨레21>에 실린 김영하 작가 인터뷰에는 이런 언급이 나온다. “정치 효능감은 둘로 나뉜다. 첫째, 정치적 행동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내적 효능감). 둘째, 시민들의 요구에 정치인·관료와 같은 정치 주체가 반응할 것이라는 신념(외적 효능감).” 정치적 무력감과 냉소가 문제라는 지적이 수없이 반복되었음을 떠올리면, 정치 효능감을 높이는 것은 굉장히 좋고 필요한 일로 느껴진다. 정치 분야가 아니더라도 효능감이라는 말은 보통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의 의미로 쓰인다. 심리학의 자기효능감(self-efficacy) 개념도 잘 알려졌다. 그런데 이 개념을 말과 글로 만날 때마다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든다. 왜일까? 우선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히틀러가 유럽 각국을 굴복시키며 잘나가던 시절, 나치 지지자들이 느낀 정치 효능감은 엄청나지 않았을까? 세계를 바꿀 수 있으며, 바꾸고 있다는 믿음은 극치의 황홀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감히 촛불을 나치에 견주는 것이냐’며 화를 낼지 모른다. 하지만 효능감이라는 개념 자체가 원래 그렇다.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묻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많은 효능감 담론들은 효능감이 높을수록 좋고 낮을수록 나쁘다는 전제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효능감에는 죄가 없다. 문제는, 자극과 반응을 극대화하는 데만 몰두하는 ‘효능감 게임’이다. 신문, 방송 같은 올드 미디어도, 팟캐스트 같은 뉴 미디어도 모두 이 게임에 혈안이다. 콘텐츠가 수용자 감정을 얼마나 격발시킬 수 있는지가 관건이므로, 효능감 게임은 이제 일종의 ‘타격감’ 경쟁이 된다. 여기서 타격감은 야구 용어가 아니라 디지털 게임에서 몬스터를 칼로 쳤을 때 유저가 느끼는 공감각적 효과를 가리킨다. 타격감은 타격받은 상대의 반응으로 결정된다. 상대의 몸이 산산조각 나는 시각효과, 끔찍한 비명, 폭발음과 마찰음 따위가 적시에 터져 나오면 그 게임은 ‘타격감이 좋은’ 것이다. 이 분야의 전통적 강자는 역시 <조선일보> 및 계열사다. 열거하자면 책 몇 권으로도 부족하니 최근 사례 두 개만 보자. <티브이(TV)조선>이 4월2일 내보낸 방송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이대목동병원, 환자 죽어나가는 ‘중환자실’서 ‘야식’ 파티.” 신생아 사망 사건이 발생한 날, 간호사들이 중환자실에서 컵라면과 김밥 등의 야식을 먹었다는 폭로성 기사였다. 기사가 나가자 시민들은 치를 떨며 분노했다. “어떻게 아픈 아기가 있는 중환자실에서 균이 득실거리는 야식을 먹을 수 있는가?” 간호사들은 어처구니없어하며 항의했다. “식당 갈 시간조차 없어 끼니를 거르기 일쑤인 간호사들이, 중환자실과 분리된 휴게실에서 컵라면을 먹은 게 과연 ‘야식 파티’라고 매도당할 일인가?” <티브이조선>이 간호사들을 식탐에 빠진 악마로 만드는 사이, 감염의 실제 원인, 중증 환자를 돌보는 인력의 부족, 열악한 노동환경 같은 정작 중요한 구조적 문제들은 아스라이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일보> 역시 만만치 않다. ‘미투’ 운동이 숨 가쁜 속보로 올라오던 당시, <조선일보>는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 교수들의 성폭력 사건을 보도했다. 신문은 피해자가 비공개를 전제로 학교에 제출한 진술서를 “단독입수”했다면서 가림 처리 없이 내용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진술서에 묘사된 가해자의 행적은 독자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중요한 건 거기에 피해자의 신상정보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가해자를 단죄한다는 명분으로 피해자에게 심각한 2차 가해를 저지른 것이다. ‘미투’ 관련 보도 중 최악의 사례다. 효능감은 중요하다. 그것은 집단적 참여가 만들어내는 사회 변화의 동력이다. 그러나 효능감에는 ‘내용’과 ‘방향’이 없다.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느낌’과 ‘세상이 실제로 바뀌는 것’은 다른 것이고, ‘세상이 더 낫게 바뀌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무엇이다. 효능감의 내용을 채우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비판과 성찰이라는, 효능감 낮은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 작업이 무시되는 순간, 사회는 효능감 게임의 지옥이 된다. ‘축제와 탈진의 반복’을 넘어서 어떻게 더 나은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어렵지만 절박하게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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