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기는 민주화 세력이 단독으로 집권한 노무현 정부 시기다. 이 시기는 정부가 담론을 주도한 점에서 이전과 다르다. 지금은 두 차례의 보수 정권을 거쳤음에도 4기 담론의 틀이 지속되는 시기다. 당시에 표출된 문제의식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동력을 유지하며 출구를 찾고 있다.
지금 정부의 핵심 과제는 큰 틀에서 당시와 다르지 않다. 물론 상황이 바뀐 만큼 내용은 업그레이드돼야 한다. 조건은 당시보다 훨씬 낫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분명한 방향 설정과 추진력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성취를 향해 가야 한다.
나라와 사회·경제·안보의 뼈대를 세우거나 바꾸는 것을 시대적 사안이라 한다면, 이를 둘러싼 담론은 시대적 담론이 된다. 이런 담론은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 담론 진행 과정은 정치적 변화와 연동되는 경우가 많으며, 담론 결과가 관련 정치세력의 부침을 낳기도 한다. 시대적 담론은 대개 몇 해 안에 일단락되지만, 그 영향은 이후 상당 기간 지속돼 한 시대를 이룬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는 대략 20년마다 시대적 담론이 활성화한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1945년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48년까지 ‘해방 3년’이 있다. 이를 1기라고 하자. 이 기간에 ‘어떤 나라를 만들 건가’라는 주제로 다양한 담론이 폭발적으로 제기된다. 논쟁이 일단락된 뒤에는 승자인 이승만 정권의 독주가 10여년 동안 이어진다. 2기는 1960년 4·19혁명 때부터 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까지다. 나라의 진로와 정치 체제가 주된 쟁점이었던 이 시기는 결국 군 출신 인사들이 주도하는 독재정권과 권위주의적 산업화에 길을 내준다.
3기는 1980년대 후반이다. 민족·민중 문제에 대한 인식 심화와 함께 진행된 치열한 민주화 투쟁은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민주화 시대를 연다. 또한 미-소 냉전 종식은 1990년 9월 우리나라와 소련의 수교와 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으로 이어진다. 이 시기 담론들은 이후 정권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주요 정책 논의의 바탕이 된다. 4기는 민주화 세력이 단독으로 집권한 노무현 정부 시기(2003~07년)다. 이 시기는 정부가 담론을 주도한 점에서 이전과 다르다. 1~3기에는 시민사회가 담론을 이끌거나 시민사회와 정치세력의 제휴 또는 대결 구도에서 논의 틀이 짜였다.
지금은 두 차례의 보수 정권을 거쳤음에도 4기 담론의 틀이 지속되는 시기다. 당시에 표출된 문제의식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동력을 유지하며 출구를 찾고 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방향을 잡아가려면 당시의 과제와 담론 내용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공격적인 문제 제기로 논의를 주도하려 했다. 4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 개정 또는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과거사진상규명법 제정, 언론관계법 개·제정) 추진을 비롯해 수도 이전, 공공기관 지방 이전과 혁신도시 건설, 대연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교원평가제 및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이라크 파병, 국방개혁, 전시작전권 환수, 2차 남북정상회담, 과거사위, 균형외교 및 동북아균형자론, 사법개혁, 기자실 정비 등 언론개혁, 종합부동산세 등이 추진 또는 시행됐다.
담론 집중기에 걸맞게 굵직한 사건·사고도 잇따랐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추진 및 기각 결정(2004년 5월), 북한의 1차 핵실험(2006년 10월), 이슬람 과격세력에 의한 김선일씨 피살(2004년 6월)과 교회 선교단원 피랍(2007년 7월), 부안 방폐장 사태(2003년 7월), 태안 기름유출 사고(2007년 12월), 대추리 사태(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 2006년 5월), 황우석 사태(2005년 12월) 등이 그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민주 정부로서 정체성을 갖고 개혁을 시도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책으로 볼 때는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다. 게다가 담론 형성과 정책 추진 과정에서 민주·진보 세력을 결집하지 못하고 보수·수구 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유발했다. 여러 보수파가 간판을 바꾼 뉴라이트 세력이 이때 형성됐으며, 과격시위를 일삼는 ‘아스팔트 보수’가 일상화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집권한 2008년부터 2016년까지 9년은 역사의 후퇴를 뜻하는 백래시(backlash) 기간이다. 이 물길을 돌려놓은 것이 2016~17년 촛불집회다.
2000년대 초의 시대적 사안, 곧 역사적 과제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6월항쟁으로 쟁취했으나 엘리트 중심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기반을 크게 넓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념 정당이 공존할 수 있는 정당·선거제도 개혁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는 비민주적 제도와 관행의 개선, 중산층 이하 민중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 마련 등이 포함된다.
둘째는 이전 수십년 동안의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지탱하면서 소수의 권력 독점과 양극화 심화에 기여해온 이른바 성장동맹을 대체할 ‘복지동맹’의 구축이다. 이는 경제·사회 및 각 부문·지역의 균형 발전, 저성장 시대에 걸맞은 삶의 여건 개선, 실질적 민주주의의 토대 강화 등을 위해 반드시 이뤄야 할 과제다. 셋째는 한반도·동북아의 평화와 공존공영을 보장하고 남북통일에 기여할 외교·안보 정책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견국이라는 위상과 냉전 이후 상황에 맞는 외교·안보 틀이 필요하다.
정부는 이들 과제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노력도 했다. 노 대통령 특유의 과감한 시도도 적잖았다. 안타깝게도 첫째와 둘째 과제는 별로 이뤄지지 못했고, 셋째 과제는 절반의 성취에 그쳤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당시 의회 다수당을 보수세력에 내준 소수당 정부였으나, 2004년 4월 대통령 탄핵 기간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이겨 다수당 정부가 됐다. 방향과 추진 방법을 잘 택했다면 여러 개혁을 이뤄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2004년 내내 최대 현안이었던 4대 개혁입법이 전체적으로 실패한 뒤 노 대통령은 보수세력과의 타협을 통해 기존 구조를 유지·보수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2005년 7월의 대연정 제안과 2006년 내내 이슈가 된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등이 그 맥락에 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이념적 위치를 ‘좌파 신자유주의’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진보 세력은 분열했고 수구·보수세력은 오히려 더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이전의 권위주의적 산업화 정책 기조를 되살리고, 댓글 공작, 블랙리스트 강화, 공안기관 및 보수 관변단체 활성화 등을 통해 파시즘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부정적 생명력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지금 정부의 핵심 과제는 큰 틀에서 당시와 다르지 않다. 물론 상황이 바뀐 만큼 내용은 업그레이드돼야 한다. 조건은 당시보다 훨씬 낫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을 경험하면서 이들이 기댔던 과거 모델의 한계가 생생하게 드러났고, 촛불혁명을 통해 기득권 세력의 완고한 보루들이 크게 위축됐다. 민주·진보 세력의 통합성도 상당한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양극화가 더 심해지면서 개혁을 지지하는 국민의 바람도 커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분명한 방향 설정과 추진력이다. 셋째 과제는 곧 열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를 낸다면 선순환 궤도에 들어갈 수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인내심을 갖고 노력해온 문재인 정부의 의지가 돋보인다. 첫째와 둘째 과제는 아직 큰 성과가 없다. 현 정부가 이제까지 한 일은 이전 정부의 부정적 유산에 대한 정리가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문 대통령은 이것만으로도 7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한다.
첫째와 둘째 과제는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둘을 뭉뚱그려 표현하면 민주주의의 확대·심화다. 민주주의는 정치에 참여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일하는 모든 사람도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폭이 넓어져야 한다. 또한 선거 등을 통해 표출된 이들의 의사는 대표성 있게 정치제도와 정책에 반영돼야 한다. 이는 국민 삶의 질을 높여 실질적 민주주의와 복지동맹 강화에 기여하고 경제에도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것이다.
현 정부 임기 동안 이 과제를 잘 이뤄낸다면 2000년대 초 담론 제기에서 시작된 한 시대가 제대로 마무리되고,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차원의 시대적 담론이 제기될 무대가 마련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성취를 향해 가야 한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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