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에디터 에디터 직책을 맡은 뒤 첫번째 다짐은 부서원들과 평등하게 격의없이 소통하자는 것이었다. 얼마 뒤 동료들에게 “부서 운영의 책임자지만 저 역시 구성원 중 한명입니다. 그러니 제 의견을 ‘지시’가 아닌 ‘여러 생각 중 하나’로 받아들여줬으면 합니다”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제목이나 사진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어때?”라는 나의 의견 제시는 대개 “바꾸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가끔 “점심 약속 없으면 같이 식사할까?”라는 권유마저 더러는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함께했다는 걸 눈치채기도 했다. 떡볶이를 선호한 여성 후배는 순댓국을 먹자는 내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권력관계의 불균형, 비대칭성은 결코 내 생각을 ‘대등한 여러 의견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권한이나 특권은, 그것을 가진 이에게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투는 권력을 이용한 성범죄에서 촉발되긴 했으나 본질적으로는 남성이 태생적 기득권자로 존재하는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냈다. 성적 대상화와 차별을 공기처럼 체감하는 여성과 달리 남성은 지금까지는 물론 어쩌면 영원히 그런 현실을 모를 수도 있다. 이런 무지 탓에 나도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긴장과 두려움이 말과 행동을 움츠러들게 한다. 주변 남성들도 지금 자신의 규범이나 행동이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경계 안에 있는지를 두고 혼란을 겪고 있다. 나에게 미투는 정치적 올바름이 내포한 이중성을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 미투의 대상이 된 이들 중엔 평소 인간의 존엄과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차별이나 편견과는 거리가 먼 언어를 써오던 유명인이 많다. 덕분에 이들은 권력을 앞세워 저질렀던 밤의 악행을 오랫동안 은폐하고 아침이 되면 완벽한 여성주의자, 평등주의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안희정 전 지사가 “미투를 지지한다”고 외치던 모습은 이명박 전 대통령 집안의 가훈이 ‘정직’이라는 사실만큼이나 위선적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되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내는 데 장애물’이 된 셈이다. ‘여성의 몸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는 사회는 법·제도와 같은 거시적 수단만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음도 깨닫는다. 세계 최고 수준의 양성평등 시스템을 갖춘 스웨덴에서 벌어진 ‘미투 쓰나미’가 이를 보여준다. 장관의 절반, 국회의원의 40%가 여성인 스웨덴은 ‘페미니스트 정부’를 자처한다. 그러나 미시 권력이 지배하는 일상에는 여전히 남자들의 패권이 구석구석 스며 있었다. 지난해 가을 발화한 미투운동을 통해 정치·언론·문화 분야 등에서 지금까지 스웨덴 유력인사 40여명의 추악한 성범죄 행위가 폭로됐다. 엄청난 충격에 빠진 스웨덴인들이 그나마 위안을 얻는 건, 그동안 추진해온 양성평등 정책이 뒤늦게나마 여성들이 두려움 없이 미투에 나서게 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미투 운동의 향방을 예측하긴 어렵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냉소도 있지만 적어도 시곗바늘이 미투 이전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건 미투가 남성패권적 공동체에 대한 깊은 불신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들만의 외로운 투쟁에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편견의 안경을 벗고 진심 어린 호기심으로 남성 바깥의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려 한다. 난 남성과 여성이 대등하게 공존하는 총천연색의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없었던 가부장 사회 안에서 자라왔다. 그건 적어도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건 내 잘못이다. 무지가 면죄부를 주던 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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