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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미국의 실패를 기도하는 이상한 ‘미국 추종자들’

등록 2018-03-21 18:46수정 2018-03-21 19:41

김종구
편집인

개인적으로 ‘종북주의’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싫어하지만 ‘종미주의’라는 말도 썩 달갑지 않다. 과도하게 미국에 굽실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릴 때도 많지만, 그래도 종미주의라는 말은 종북주의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언어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평창동계올림픽 때 일부 보수 언론·정치권의 행동을 보노라니 그 단어가 계속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시시콜콜 미국의 불편한 심기를 거론하며 우리 정부를 꾸짖는 모습이 해도 해도 너무했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뜻을 거스르고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북쪽 인사와는 한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개막식에서 퇴장했고, 이방카 트럼프 미 백악관 선임고문 역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과의 대화 문턱을 낮춰달라고 미국에 요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고, 미국과 북한 사이에 중매를 놓겠다는 한국의 제안에 미국이 콧방귀도 뀌지 않는 걸 보라. 미국과 통하지 않고 북과만 통하다가는 끝내 통(고통)에 이를 수 있다. ‘평창 쇼’가 끝나고 나면 김정은의 핵 놀음과 미국의 강경 대응이 부딪칠 일만 남았다….’ 이런 비난과 조롱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 사람들에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적으로 수용했다는 소식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도 유분수지, 어떻게 트럼프 대통령이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된 보수세력은 심각한 공황상태에 빠졌다. 급기야는 지금까지 절대지존으로 모시던 미국 최고지도자를 향해 대놓고 배신감을 토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트럼프가 너무 즉흥적이다. 백악관 내부에서조차 트럼프의 행보를 걱정스러워하고 있다. 변덕스러운 대통령이 아무 준비도 없이 북한과 마주 앉아서는 위험하다고 미국 내 전문가들은 말한다….’ 남남 갈등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미미 갈등’ 조장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평소 입에 달고 살던 ‘한-미 간에 조그만 틈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어느 틈에 사라졌다. 북-미 대화에 비판적인 미국의 언론, 전문가들의 말만 쏙쏙 골라 한-미 간에 틈을 벌리려 안간힘을 쓴다. 그들의 미국 선호는 결국 선택적이었던 셈이다. 북폭, 코피전략, 참수전략을 추진하는 미국은 좋지만, 북-미 대화니 통 큰 해결이니 하는 미국은 싫다. ‘호전적인 미국 예스, 평화적인 미국 노!’

그들의 발언 내용을 보면 북-미 회담의 성급한 낙관론에 대한 경고나 우려, 경계 수준을 넘어선다. “세계는 지금 33세 독재자의 계략에 놀아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북한의 사기극으로 끝날 게 분명하다”는 단언마저 서슴지 않는다. 사람은 원래 자신의 예측이 들어맞길 기원하는 속성이 있다. ‘그것 봐라, 내가 잘 안될 것이라고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그들의 입지는 북-미 회담이 실패해야 더욱 빛난다. 그러니 지금 일부 보수세력들은 찬물을 떠놓고 북-미 회담 실패를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실패를 염원하는 이상한 미국 추종자들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보수주의와 현실주의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진보주의보다 보수주의가 현실의 조건을 중시하고 실현 가능한 해결방안을 선호하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는 딴판이다. 북핵 문제에 관한 한 보수세력은 아무런 현실적 해법도 내놓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비판만 한다. 좋게 말하면 비관주의인데, 그 모습을 보노라면 ‘비관주의자는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형편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버나드 쇼의 말이 생각난다. 사실 그들에게는 비관주의라는 말은 분에 넘친다. “고강도 대북 제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면 굳이 회담을 구걸하지 않더라도 김정은은 제풀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을 보면 현실에 발을 붙이지 않은 몽상가들이다.

한 보수신문의 원로 논객은 최근 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트럼프는 결별을 위해 김정은을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정은을 때리기 위한 명분 쌓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 경우 일부 희생을 감수하는 전쟁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이 말에서는 경고나 예측이 아니라 은근한 바람과 기대가 묻어난다. 참으로 섬뜩하다. 안보 상업주의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한반도의 불안과 위기에서 살길을 찾는 보수의 남루한 행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건가.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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