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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혜경 칼럼] 새로운 말이 새로운 시대를 연다

등록 2018-03-13 18:47수정 2018-03-13 19:05

노혜경
시인

언어 없이 존재 없고 개념 규정된 용어 없이는 사건도 없다. 그럴수록 개념 규정을 정확하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의 수많은 용어들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여성의 삶에 존재하는 많은 것을 의미화하고 드러내고자 세심하게 고안된 실천의 말들이다.

낯선 말들이 정신없이 쏟아지고 있다. 미투, 성폭력,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 심지어 가스라이팅이라는 말까지 언론 지면에 등장한다. 이 중 ‘미투’는 권력자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운동의 이름이고, 나머지는 페미니즘에서 그동안 이름이 없어 은폐되기 일쑤였던 폭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자 사용해왔던 말들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유명한 말도 있거니와, 이름을 제대로 부른다는 것은 인지되지 못하던 어떤 존재나 현상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친족 성폭력이라는 말이 근친 강간 대신 사용되면서 훨씬 많은 범죄가 드러날 수 있게 된다. 데이트폭력이라는 말이 사용되면서 연애가 폭력으로 바뀌는 문제를 훨씬 빨리 인지하게 된다. 2차 가해(재피해자화)라는 말이 있어서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고립되는 일을 조금은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제대로 말의 개념투쟁과 인정투쟁을 거치지 않고 사용되면 대중에 의한 오남용은 필연적이다. ‘미투’라는 말을 보자. 재작년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형식으로 사건화되었던 일련의 폭로와 달리,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한 ‘#미투’는 특별한 논쟁이나 개념투쟁 없이도 일반화되고 있다. 문제는 개념투쟁 또는 개념의 학습 없이 사용되는 용어들이 실제 문제를 가리키는 데 실패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권력자의 은폐된 성폭력을 드러낸 용기있는 여성들을 따라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을 공론화하고자 하는 운동을 가리키던 이 말이, “미투에서 자유로운 남성이 어디 있나”라는 식으로 남성 물귀신의 언어가 되면서 성폭력의 공론화라는 의미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흡사 여성이 폭로하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왜곡된다.

‘미투에서 자유로운 남성’이란, 성폭력 가해를 하지 않는 남성뿐만 아니라 이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반성한 남성이다. 당연히 있어야 하고 또 있다. 그것도 아마 상당히 많이 있을 것이며 앞으로는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언어가 변질되기 시작하면 새로운 말과 함께 오는 새로운 운동은 폄훼되고 정치적으로 변질되어 힘이 약화된다. 저질 담론 투쟁이다. 새로운 말이 가리키는 새로운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로 사용하기 위한 노력이 언론과 독자의 의무가 되는 이유다.

언어 없이 존재 없고 개념 규정된 용어 없이는 사건도 없다. 그럴수록 개념 규정을 정확하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의 수많은 용어들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여성의 삶에 존재하는 많은 것을 의미화하고 드러내고자 세심하게 고안된 실천의 말들이다. 여성 자신에게서도 은폐되었던 다양한 기쁨과 고통을 드러내어 존재하게 함으로써 여성을 온전한 주체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그런데 바로 그러하기에 이 말들은 올바른 사용법을 배워야 하는 말들이다. 전기밥솥 하나 살 때도 사용설명서 보고 낑낑대며 공부하면서, 성폭력이라는 단어 하나의 개념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성폭력이라는 말은 젠더권력, 즉 오랜 가부장제 역사의 경험으로 인해 완전히 내면화된 남성지배가 야기하는 모든 폭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강간’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등을 포괄하는 이 어휘를 축소한 다음, “터치는 있어도 성폭력은 없다”고 말하는 여성 정치인이 있을 정도다. 그 ‘터치’라는 말이 바로 성추행을 가리키는데도 말이다.

1990년대 들어 예전의 여성해방투쟁과는 결이 다른 페미니즘 운동이 생겨나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성폭력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여파로 어떤 세대에겐 성폭력이라는 말은 설명 없이도 통용된다. 그러나 여전히 성폭력을 젠더폭력이 아니라 성행위폭력으로만 인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오해의 여지 없이 사용되도록 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 최소한 정치인과 언론인에게는 있다.

말은 바꾸어갈 수도 있고 새로 배울 수도 있다. 달라진 생각은 달라진 사회를 향해 가는 달라진 말을 만들고, 그 달라진 말이 지닌 의미가 분명하게 인지되고 보편화될 때 존재는 언어의 새집으로 이사갈 수 있다. #미투 운동을 통해 땅은 부드러워졌다. 낡은 세상에 그대로 살고 싶지 않다면 페미니즘을 공부하자. 새로운 언어를 배우자. 페미니즘이 ‘공용어’(페친 최성용의 말)가 될 때 새 세상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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