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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평창 망상, 동맹을 넘어서는 결연의 힘? / 신현준

등록 2018-02-23 17:38수정 2018-02-23 19:12

신현준
성공회대학교 교수·대중문화 평론가

평창올림픽에 대한 기사가 신문을 도배하고 있는 시점에서 ‘크리틱’까지 칼럼 하나를 보탤 필요는 없겠지만, 별다른 글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거대한 비즈니스가 되고, 환경을 난폭하게 파괴하고, 국제정치가 난무하고 있는 글로벌 메가이벤트에 대해, 반대운동에 동참하기는커녕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 것이 가끔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건이라도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마주치고 부대끼고 뒤섞이면서 새로운 경험, 서사, 소통이 만들어지는 것은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고 믿어 보자.

그 점에서 이번 올림픽 경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빙속 여자 500m 경기 뒤에 이상화와 고다이라 나오가 보여준 각별한 관계였다. 여러 보도를 종합하면, 둘 사이의 관계는 배려, 존중, 공감 등의 감정으로 넘쳐났다. 경쟁을 통해 승패를 가리는 ‘결과’가 스포츠의 전부가 아니며, 그 결과를 향해 노력했던 ‘과정’이 훨씬 중요하다는 교훈을 새삼스럽게 알려준 장면이었다. 그 순간에는 두 사람이 ‘국가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우연히 그 나라에 태어나서 그 나라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었다. 불필요한 비유일지 몰라도,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사이의 ‘라이벌’ 관계와는 또 달라 보였다.

시대의 신호이기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의 각별한 관계는 ‘아시아 여성’이기 때문에 더 극적이었던 것 같다. 서양 선수들이 저런 관계를 보일 때 깊이 공감하기는 쉽지 않고, 남성 선수들이 저런 감동 스토리를 연출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택시비’라든가 ‘음식 택배’ 등이 그저 한낱 사물이 아니라 인간적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개인 사이의 관계를 국가 사이의 관계로 비화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 단지, 국가 사이의 관계가 아무리 삐걱거려도 개인 사이에는 끈끈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 두 사람의 경우는 국가대표 운동선수라는 지위 때문에 조건이 남달랐겠지만, 보통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타자’와 연을 맺고 소통하면서 각별한 감정이 오가는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 너도 거기서 나랑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구나’라는 공감이 그 관계 맺기의 출발일 것이다.

그 관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결연’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불교에 기원을 둔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인연을 맺는다’는 뜻인데,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지만 ‘자매결연’이라는 표현은 이미 굳어져 있다. 그 용례에서 보듯, 동맹이라는 경직되고 살벌하고 정치적인 용어와 달리 결연이라는 용어는 유연하고 평화롭고 정서적이다.

이런 결연의 힘이 한-일 관계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에도 작용할 수 있을까. “우리 민족끼리” “조선은 하나다” 등의 메시지가 날이 무뎌진 느낌을 지울 수 없더라도, 그들은 어쨌든 인연을 맺으러 왔다. 대표단, 예술단, 응원단 모두 여성을 앞세운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지만, 남성이 그 역할을 담당하리라고는 기대조차 힘든 일이다. 현정화와 리분희가 패럴림픽을 통해 27년 만에 조우할 것이라는 소식도 들려오는데,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어도 평창에는 크고 작은 인연들이 맺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현정화에게 리분희 같은 존재가 나한테는 누구인가’를 사유하면서 개인적 결연을 시작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결연’의 꿈은 ‘동맹’의 현실 앞에서 한낱 낭만적인 망상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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