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인간주의는 또한 부족주의로 나타나기 쉽다. 부족주의는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을 가장 우선하는 사고방식이다. 최근 늘고 있는 주류 민족·인종 집단의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를 전제로 하는 점에서 가장 위험한 부족주의에 해당한다.
인간주의 위기의 배경에는 지구촌에서 지난 수십년 동안 나빠진 불평등 문제가 있다. 불평등은 사람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약화하고 개인·집단·나라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조장한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상황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는 많은 사람의 사상·사조·철학이 반영돼 있다. 당연히 좋은 생각이 많아야 더 나은 세상이 이뤄질 가능성이 커진다.
사상·사조·철학은 다양하지만 그 뿌리를 파고들면 크게 인간주의와 초월주의로 나눌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 진리 판단의 근거와 규범의 근원이 사람에 있으면 인간주의이고, 그것을 초월적 존재에 두면 초월주의다. 원칙적으로 양쪽의 우열은 없다. 사람에겐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으나, 현실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어 초월에 대한 지향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질이다. 어느 쪽이든 수준이 높은 집단은 대개 문제 해결 역량이 풍부하고 삶의 만족도가 높다.
인간주의(humanism)는 사람과 사람됨, 사람의 삶을 모든 사고와 행동의 중심에 둔다. 사람의 본래 가치를 인정하고 역량을 믿으므로, 이성과 경험, 공감을 중시하고 사람에 대한 차별·억압의 철폐와 모든 사람(인류)의 복지 향상을 지향한다. 여기서 사람은 세계의 본질적 존재로서 진리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주체다.
인간주의와 비슷한 말로 인본주의(humanitarianism),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 인문주의, 인도주의 등이 있다. 인본주의는 유교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개념이다. 사람의 복지를 가장 우선하는 점에서 인간주의와 일치하지만, 인간주의와 짝을 이루는 민주주의가 인본주의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인도주의는 사람의 존재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된 인권과 박애를 중시한다. 인문주의는 신과 신학의 영향에서 벗어난 인문(liberal arts), 곧 사람의 교양을 강조하므로 인간주의와 같은 뿌리를 갖는다. 인간중심주의는 사람을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실체로 보고, 신을 비롯한 초월적 존재나 사람 이외의 생물·무생물보다 우위에 놓는다. 넓은 의미의 인간주의는 이 모든 내용을 다 포괄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본주의가 더 폭넓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서구에서는 근대 이후 ‘신 대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주의가 부각됐다. 현상학, 실용주의, 해석학, 실존주의, 탈근대주의(post-modernism) 등 현대 주요 철학도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고대부터 사람을 중심에 놓는 다양한 사상·철학이 주류 위치를 차지하며 꾸준히 발전해왔다. 역사적으로 인간주의는 사람의 역량을 키우고 책임을 일깨워 인류의 삶을 풍성하게 해온 점에서 진보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근대 이후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뒷받침하는 기본 이념으로서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지금 세계에서는 타락한 인간주의가 더 눈에 띈다. 사람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더라도, 종으로서 인류가 이제껏 이뤄온 성취까지 망가뜨리는 행태가 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심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선거 운동 때부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을 거세게 공격했다. 정치적 올바름은 말과 행동의 표현에서 인종·민족·성·종교 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규범적 제안이다. 트럼프는 이것이 억압이라고 강변한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자신에게 불리한 모든 보도를 ‘가짜 뉴스’로 매도하면서 왜곡된 주장을 일상적으로 한다. 그에게는 진리는커녕 소통의 기초가 되는 객관적 사실(fact)도 존중받지 못한다.
이런 일이 미국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탈진실(post-truth)이라는 말은 옥스퍼드 사전의 지난해 ‘세계의 단어’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탈진실 사회에서는 진실이 믿음으로 대체되고 정서나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사람들 사이의 주장이 사실보다 우선한다. 당연히 이런 사회에서는 진실이 축적되지 못하고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역량도 떨어진다. 탈진실은 탈근대 논의와 연관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탈근대는 근대에 대한 반성이 주된 측면이지만, 탈진실은 진실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타락한 인간주의는 또한 부족주의(tribalism)로 나타나기 쉽다. 부족주의는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을 가장 우선하는 사고방식이다. 폭넓은 규범보다 ‘믿을 사람은 ○○밖에 없다’는 생각이 앞서고 이를 ‘인간적’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최근 늘고 있는 주류 민족·인종 집단의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를 전제로 하는 점에서 가장 위험한 부족주의에 해당한다. 혈연·지연·학연을 공적인 가치보다 앞세우는 것도 일종의 부족주의다.
권력에 모든 것을 기대는 권력중심주의도 타락한 인간주의와 손잡고 도처에서 나타난다. 진리의 근거가 취약해지면 ‘힘이 곧 정의’라는 풍조가 강해진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권력 다툼에서 밀려날 경우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갈등이 증폭된다. 스스로 강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팽창주의와 일방주의, 자신의 이익만 앞세우는 국수주의 역시 권력중심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북한 등의 독재정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주의 위기의 배경에는 지구촌에서 지난 수십년 동안 나빠진 불평등 문제가 있다. 불평등은 사람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약화하고 개인·집단·나라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조장한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상황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국제 협력과 지구촌 공동 이슈에 대한 주요 나라들의 퇴행적 태도도 인간주의 위기에 큰 책임이 있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더 심해진 이런 모습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주의가 풍부한 내용을 갖고 인류에 기여하려면 무엇보다 이성의 보편성을 재확인해야 한다. 이성은 사람이 가진 가장 심오한 자원이다. 개인의 생각에는 한계가 있더라도 종으로서 인류의 이성은 그렇지가 않으며,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은 학습과 훈련을 통해 그 정수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사람은 평등하다.
세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필수다. 부분만 봐서는 안 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실을 왜곡해서도 안 된다. 이제까지 인류가 발전시켜온 역량을 잘 활용하면 객관적 인식은 충분히 가능하다. 여기에다 자신과 세상을 개선하려는 성실한 노력이 추가돼야 한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지만, 객관적 지식과 가치합리성에 근거해 현실의 진화를 추구할 수 있기에 사람이다.
인간주의 자체도 폭을 넓혀갈 필요가 있다. 기후변화와 생태 위기, 자원 문제 등 인류가 함께 풀어야 할 심각한 과제가 늘어난다. 인류의 복지가 함께 나아지지 않으면 개인의 발전도 더 어려워지는 세계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사람과 인공지능 등이 결합한 탈인간(post-human)에 대한 언급이 잦다. 4차 산업혁명 등 새로운 기술 발전에 걸맞은 인간주의가 요구된다. 다른 생명체와 사람의 원칙적 평등과 공존공영을 지향하는 생태주의는 지난 수십년 동안 인간주의의 내용을 깊고 풍부하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주의는 힘 있고 뛰어난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주체로 둘 때만 자신과 세계의 끊임없는 발전을 보장한다. 따라서 상호 존중과 신뢰에 기반을 둔 소통은 인간주의의 필수 부분이다. 효과적인 소통을 통해 공통 과제에 대한 최선의 해법을 모색하고 책임 있는 실천을 끌어낼 수 있다.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고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적 몫은 갈수록 줄고 있다. 더 열린 자세와 더 많은 협력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다.
우리나라는 인본주의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우리 사회의 최고 이념으로 자리를 잡아왔다. 타락한 인간주의가 만연할수록 진실을 추구하고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게 인류적 삶의 길이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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