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사생활과 인권 보호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종종 이중적이다. 한 아파트 단지에 도둑이 들었는데 폐쇄회로 장치가 낡아 범인을 식별할 수 없었다. 주민들은 관리 부실을 이유로 관리소장을 내쫓고 최신 카메라를 새로 달았다. 몇 해 전 대형참사 희생자를 휴대전화 위치추적으로 가려냈을 때, 사람들은 정보통신 기술의 효용성에 박수를 보냈다.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나온 빅브러더는 ‘정보 독점과 일상적인 감시 권력’을 경계하는 엄혹한 용어다. 그러나 불편과 불안을 피하려 할 때 대중의 사생활 포기는 의외로 적극적이다. 다수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감시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사회 자체다. 이른바 대중 감시론이다. 대중 스스로 권위적 리더십을 택했다는 대중 독재론과 비슷한 맥락이다. 여기에서 감시당하지 않을 자유를 위해 조금 더 위험하고 더디고 불편한 생활을 감수하는 이들은 소수자다.
대중 감시론은 나아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를 경고한다. 과학기술 발전은 개개인을 감시권력의 주체로 만든다. 국가나 권력집단이 아닌 평범한 이웃이 나를 감시한다. 이른바 ‘개똥녀’ 사건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감시자가 될 수 있음을 웅변한다. 불행히도 감시와 폭로에는 윤리가 없다. 개인이 국가보다 더 도덕적이란 증거도 없다. 인터넷 왕따는 미란다 원칙도 고지받지 못한 채 순식간에 파탄이 나고 만다.
미셸 푸코는 간수만 죄수를 볼 수 있는 원형감옥(파놉티콘)을 통해 감시권력의 원리를 설명했다. 중앙 감시탑과 간수만 없애면 과연 모든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혹시 마주 보이는 죄수들끼리 서로를 감시하게 되는 건 아닐까.
엊그제 국내 인권·시민단체들이 처음으로 빅브러더 수상자를 선정했다. 사생활과 인권을 위협한 국가 기관과 기업들의 ‘공로’를 가리기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이 상의 후보가 되는 상상은 아무래도 끔찍하다.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