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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법리 같은 소리 하네 / 김남일

등록 2018-02-13 17:43수정 2018-02-13 19:38

김남일
정치팀 기자

고위 법관을 지낸 한 법조인은 한밤 남의 집 문지방을 넘어선 도둑에게는 가차 없이 실형을 선고했다고 고백했다. 이마를 스치는 바짓자락의 서늘함에 아내 손을 꼭 잡고 잠자는 척해야 했던 ‘그날의 공포’ 때문이라고 했다.

개인 경험과 선입견이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법관은 거의 없다. 대신 나의 법정에선 오로지 증거와 법리만이 진술할 수 있다며 젠체한다. 그런 법관들도 종종 ‘누구누구는 천재’라며 혀를 내두른다. 검사, 변호사, 당사자가 쏟아내는 수만 쪽에 달하는 서증과 주장, 그 복잡한 쟁점을 정리해 결론을 뽑아내는 과정에 대한 감탄사가 바로 ‘천재’다.

법관 정형식의 그간 판결을 찾아보려 했다. 재벌 3세 이재용이 아닌, 총리 한명숙, 사장 정연주, 의원 김선동이 아닌 장삼이사가 법정에 섰을 때 그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니 얼추 30년 경력인데, 언론 보도나 판결 검색을 해보아도 손에 잡히는 게 거의 없다. 판결문 공개가 제대로 되지 않는 까닭이다.

헌법 제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고 돼 있다. 사법부는 판결문 공개에 인색하다. 대법원 종합법률정보시스템에서 검색 가능한 판결은 각급 법원 판결의 0.003%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난해 2월 검찰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판결문 공개를 확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누구든지 판결문을 검색·열람·복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판결문 공개는 사법개혁 차원에서 일찌감치 논의됐다. 2003년 12월 대법원 사법개혁위원회 전문위원이던 김선수는 ‘재판기록 및 재판정보 공개’를 심의안건으로 제안했다. 김 변호사가 밝힌 취지는 이렇다. 판결문 공개는 재판 적정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본 자료다. 법관의 권한남용에 대한 통제가 쉽지 않으므로 시민 견제와 감시가 필요하다. 법관 평가는 그가 행한 판결 연구와 분석을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 판결문 공개는 각 판사의 가치관과 전문분야를 드러나게 하고 시민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그만큼 법관은 사법부 승진체계나 위계질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1985년 사법시험 수석은 김선수였다. 노동변호사의 길을 택한 그의 사시 합격기는 유명하다. “이미 기성의 사회질서 자체가 어느 정도 불평등하게 구조지워졌을 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의 실현일까?… 사법부의 임무가 법의 평등한 적용이라고 할 때 법 자체는 이미 항상 공평 타당하며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법과 정치적 권력 및 사회, 경제적 토대와의 관계는 어떠하며, 만약 일정한 관계가 인정된다면 법에 대해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할까?… 사법시험 공부라는 것은 실정법의 해석에만 치중하여 실정법 자체의 제정 동기와 배경, 그 사회적 기능 및 한계 등에 대해서는 전연 도외시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정형식은 사법연수원 동기가 32년 전에 내놓은 성찰의 굴레를 벗었다. 그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법리는 양보할 수 없는 명확한 영역”이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은 “없었다”고 선언했다. 명확한 사실을 배척하는데 무슨 법리 타령인가. 정형식의 판단을 따르면 몇년째 병원에 누워 있는 이건희는 나이롱환자라는 얘기다. 정형식의 판결은 검찰개혁에 가려 있던 법원개혁 필요성을 알렸다는 점에서 가치있다.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가 할 일이 많다.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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