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지성팀 기자 안태근 전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서지현 검사의 용감한 고백 이후로 ‘미투’(me too)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친구와 서 검사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의대생이자 의사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을 듣게 됐다. 이 글은 친구의 첨삭을 거쳤다. 친구가 대학생 때 동아리에서 엠티를 갔다. ‘경주마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한 남자 선배가 흰색 옷을 입은 친구를 보고 말했다. “○○는 백마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남학생이 쿡쿡댔다.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하지 못한 친구는 그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동아리 선배들은 여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여자가 없으면 술맛이 안 나지”라는 말을 했다. 친구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난방용 쇠파이프에 귀를 대면 아래층 남자방 학생들이 자신을 포함한 여학생들을 외모로 순위 매기는 잡담 소리가 그대로 들려 왔다. 동아리 선배 한 명은 치위생과 여학생을 성폭행해 감옥에 가기도 했다. 친구가 인턴을 마치면서 성형외과 전공의를 지망해 면접을 보는 자리였다. 레지던트 치프(대표)가 친구에게 “결혼할 계획은 있냐” “아이를 낳을 계획은 있냐”고 물었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자며 일해야 하는데 결혼이나 육아로 자리를 비울 여자는 뽑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남자 당직실밖에 없는데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도 했다. 면접이 끝난 뒤, 매우 드문 ‘성형외과 여성 의사’인 선배한테 “선배한테 싸대기 맞고, 환자 보호자에게 머리채 잡히는 거 견딜 생각 없으면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포기했다. 교수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교수는 중간에 눈요깃거리로 수영복 입은 여자 사진들을 끼워 넣은 프레젠테이션을 수업에 사용했다. 교수들은 수시로 “여의사는 남자의사 만나야 편하다”고 말했다(반대로 동기 남학생들은 친구에게 소개팅을 부탁하면서 “여의사는 독하고 드세니 안 된다”고 토를 달았다). 하루는 레지던트이던 친구가 남자 실습생에게 할 일들을 전달하던 중이었다. 친구가 “오럴테스트(구술시험)도 준비하세요”라고 말했는데, 뒤에 있던 전공과 과장이 말했다. “오럴? 블로잡?”(블로잡은 구강성교를 일컫는 말이다) 이 과장은 일요일이면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기구가 없어 수련을 포기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성형외과 면접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나중에 친구가 일하는 병원 주변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너를 딸같이 생각하잖아.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래.” 두 번의 술자리 제안을 친구는 거절했다. ‘딸자식이 있는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이었겠나’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불편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길고 어두운 이야기 끝에 친구가 말했다. “근데 그거 알아? 나도 ‘드센 여자’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다른 여의사들과 다르다’는 말을 칭찬으로 생각했더라고.” 폐쇄적인 조직에 상명하복으로 굴러가는 검사, 의사 같은 전문직 집단에서 성범죄가 일어나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우리집 아재> <예민보스 이리나> 같은 웹툰들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직업은 둘째치고 10살도 안 된 어린아이일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여성이 차별과 혐오, 성폭력에 노출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나같이 성적 수치심을 느낀 일을 단 한 번도 겪지 않은 남성들은 ‘운 좋게 살아남는 삶’이란 여성들의 이런 삶의 맥락을 알지 못하면 왜 지금 ‘미투’, ‘영페미니즘’ 같은 운동이 뜨거운 지지를 얻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남자들이여, 입은 다물고 귀는 열 때다.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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