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학교 교수·대중문화 평론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뭔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차라리 언론과 방송에 오르내린 이 단어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이 정상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한 신통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일 텐데, 반년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인류 역사상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한 유시민의 발언에도 그런 피로감이 묻어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던 집, 일하고 있던 작업실, 장사하고 있던 가게에서 쫓겨나는 일은 도무지 끊이질 않는다. 최근에 내가 방문하여 ‘연대’한 곳은 서울 서촌에 있는 한 식당(족발집)이다. 건물주가 바뀌더니 보증금을 3천만원에서 1억원으로, 월세를 297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올려달라고 통보했다! ‘나가라’는 것 말고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기 힘든 요구다. 사법부 역시 ‘막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건물주의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얄궂게도 판사가 의사봉을 쾅쾅쾅 두드린 날은 위 방송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하루 전이다. 식당 주인 부부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철문을 걸어 잠그고 돌입한 점거농성은 여기저기서 당도한 연대의 손길에 힘입어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사이 네 차례의 강제집행이 들이닥쳤고, 그럴 때마다 폭력이 행사되어 주인 한 명은 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폭력 앞에서 항상 긴장하면서 지내는 이곳이 처절하고 살벌하다. 용산 참사 이후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세상은 많이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공간이 그저 처절하고 살벌한 것만은 아니다. 이곳에 상주하거나 방문하는 사람들이 맺는 관계는 보통의 일상에서 맺는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힐 때 시비를 다툴 수도 있는 사람들이 철문의 문턱을 넘어 마주치면 서로를 환대하고 우애와 부조의 행동을 나눈다. 자립, 자치, 자율 등의 대안적 윤리가 이런 공간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일부의 비밀로만 남겨두고 싶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이런 공간을 역치공간(?値空間)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불친절한 용어에서 ‘역’(?)이라는 한자는 문턱이라는 뜻이다. 문턱 안의 세상과 문턱 밖의 세상은 너무 다르다. 이런 공간에서는 놀라운 창의성이 나올 때도 있다. 점거농성장에 출퇴근하고 있는 음악가이자 기획자인 황경하는 이 현장을 ‘점거공동체’라고 불렀다. 그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별난 제목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기획한 인물인데, 최근에는 점거공동체에 연대한 음악가들을 모아 <새 민중음악>이라는 타이틀로 세 종의 연작 음반을 제작하고, 그 노래들을 현장에서 연주하고 있다. 그 음악가들 가운데 한 명인 김동산은 최근 <서울·수원 이야기>라는 ‘솔로 앨범’을 냈는데, 스스로 ‘출장작곡가’라고 말하는 그는 철거현장에서 들은, 쫓겨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사로 만들어 블루스풍의 음악에 얹었다. 이 음악이 무조건 좋다고 강권하지는 않겠다. 사람의 몸이 마주치고 부대끼는 곳이 항상 원만할 수는 없기에 점거공동체를 낭만적으로만 묘사할 생각도 없다. 단지, 삶의 극단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음악이 만들어질 수 있고, 그 음악은 때로 잊기 힘든 감동을 자아낸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감동’이라는 말이 촌스러워도 별수 없다. 즉, 젠트리피케이션을 음악으로 표현하면 ‘쫓겨나는 사람들의 블루스’다. 그래서 “막을 방법이 없다”는 ‘쫓아내는 사람의 행진곡’의 후렴구 가사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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