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희
국제 에디터
수집가들 사이에 꽤 인기 있는 우표가 있다. 1996년 북한이 발행한 40전짜리 우표, 흰옷을 입은 여인의 사진 옆에 ‘화인 스타가수 덩리쥔’이라고 써 있는.
대만을 넘어 아시아 최고 스타였던 덩리쥔이 타이에서 갑작스럽게 숨진 지 1주기가 되던 때, 북한은 왜 이 우표를 발행했을까. 북한이 처음으로 대만과 관련한 우표를 발행한 데는 한-중 수교로 악화된 북-중 관계가 반영됐다는 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덩리쥔 노래를 좋아했다, 중국 수집가들을 겨냥했다는 해석까지 분분하다. 폐쇄국가 북한이 바깥세상에 의외로 민감하다는 신호일 수도.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둔 예술단 공연 사전점검을 위해 한국에 오자 중국 언론들은 “북한의 덩리쥔이 한국에 갔다”며 관심을 보였다. 2015년 12월 현송월이 이끄는 모란봉악단이 베이징 공연을 4시간 앞두고 취소한 채 돌아가버리면서, “북한의 덩리쥔”은 북-중 관계의 껄끄러움을 상징하는 주역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중국이 막 개혁개방 열기로 뜨겁던 1980년대 “중국의 낮은 ‘늙은 덩’(덩샤오핑)이, 밤은 ‘젊은 덩’(덩리쥔)이 지배한다”는 말이 유행했다. 중국 당국은 오염된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이라며 덩리쥔의 음악을 금지시켰지만 사람들은 몰래 복사한 그의 음반 테이프를 들으며 마음을 적셨다.
덩리쥔이 분단체제를 뛰어넘어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란 의미로 보면, 한국 대중문화야말로 이 시대의 덩리쥔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힘으로 부르주아 반동문화를 짓눌러 버려야 한다”고 한 것은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와 노래, 패션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새로운 ‘시장 사회주의’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는 북한에서 한국 문화는 동경의 대상이며, 한국산 제품은 가장 인기가 높다.
교류와 대화가 늘어날수록, 서울올림픽에 이어 평창겨울올림픽을 개최하는 한국의 활력 있는 경제와 사회, 문화에 대한 북한인들의 관심과 동경은 커질 것이다. 북한 선수들의 평창올림픽 참가, 남북한 동시 입장, 예술단 공연 등을 두고 “주사파가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만들고 있다”고 막말을 하는 이들은 시대착오적인 극우세력의 열등감만 보여줄 뿐이다.
현송월 방한을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김정은 애인설, 음란물 관련 숙청설이란 근거 없는 오보를 냈던 보수 언론들은 이제 그가 버젓이 ‘살아나’ 한국에 오자 명품백, 여우목도리, 화장법 등을 거론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한껏 관음증적 시선을 보내다가, 자신들의 행태를 근거로 ‘현송월이 올림픽의 주인공이 됐다’며 화를 낸다.
이어서 어김없이 ‘미녀 응원단’이 등장한다. ‘평창에도 제2의 이설주 뜰까’ 같은 제목의 기사들, 북한 응원단원들의 출신 성분이 어떻고, 키가 몇㎝는 넘어야 뽑힌다는 기사들이 줄을 잇는다. ‘국가에 동원되는 젊고 예쁜 여자들’에게 실컷 성희롱적 시선을 보내다가, 남북 긴장이 고조되면 ‘북한의 악랄한 미인계’를 비난하는 도돌이표를 몇번이나 보았던가.
세상은 변했다.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을 둘러싼 공정성과 소통 논란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핵개발을 계속하는 북한에 대한 비판적 여론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여론이 화해와 평화를 불편해하는 세력의 색깔론과 종북 담론을 지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평화에 대한 염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평창은 평화를 향한 긴 여정의 첫걸음이다. 올림픽 이후를 염두에 둔 정교한 준비는 필수다. 1971년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도 치열한 전략적 계산과 준비가 있었기에 미-중 데탕트로 이어질 수 있었다. 공정, 평등, 평화를 향한 열망은 긴 여정을 지켜줄 우리 사회의 희망이자 매력이다.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