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우리는 모두 할증승차자다

등록 2018-01-11 18:10수정 2018-01-11 19:41

정규직들은 금전적 손해 때문에 저러는 게 아니다. 정말 사무치게 억울해서 저러는 것이다. 저것은 이기심의 발로라기보다 어떤 ‘정의감’에 기인한 것이다. 그 정의감은 능력이나 자격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는 확신이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이라는 오랜 신조에 대한 믿음이다.
박권일
사회비평가

새해 벽두, 우연히 어느 대형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읽었다. ‘서울교통공사 정규직 전환 미쳤네요’라는 제목이었다. “정규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구직자는 외면하고 어중이떠중이 뒷문으로 채용된 비정규직들은 정규직 되고. 이게 적폐 청산인지 적폐 양산인지 도대체 누가 적폐인지. 서울시장 실적을 위해 적폐를 양산하는 것인 양 한심하네요.”

순식간에 많은 댓글이 달렸다. 대다수가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미친 거죠. 이건 평등이 아니라 특권입니다.” “매점 아줌마도 대졸 공채로 입사해서 머리 아픈 일 하는 직원들하고 똑같은 급여 받는 거죠. 공산주의스러운 발상이죠.” “심하게 말하면 출신 성분 자체가 다른데 같은 급여 주는 거죠.”

찾아보니 2017년 마지막날 서울교통공사 노사가 무기계약직 전원을 정규직화하기로 최종 합의했다는 뉴스가 보였다. 그리고 방금 전 커뮤니티 글이 온화해 보일 정도로 끔찍한 헤이트 스피치(증오언설)의 향연을 목격하게 되었다.

<노컷뉴스>는 ‘서울교통공사 무기계약직들이 정규직들로부터 차별 발언과 인신공격에 시달린 끝에 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를 신청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교통공사 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정규직의 무기계약직을 향한 비난을 일부 캡처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무임승차 무기업무직들은 조져야 됩니다.” “평양교통공사로 꺼져라!” “노숙자랑 잡상인은 편입 안 시키나요? 수십년간 메트로와 함께해온 분들인데….” “폐급을 폐급이라고도 못 부르나요?”

협상 기간 어떤 말이 떠돌았을지 짐작할 수 있는 발언들이다. 지난해 11월16일에는 무기계약직 노동자가 자살하는 비극까지 있었다. 고인의 동료들은 경찰 조사에서 “고인이 평소 욕설과 모욕에 힘들어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 않게도, 이 지옥도는 우리의 일상이다. 인천공항에서 15년간 일해온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화하는 데 가장 격렬히 반대하는 이들은 정규직, 특히 최근 입사한 신입사원이라고 한다. 그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단어는 “무임승차”와 “공정사회”다.

시민들이 전부 정규직에게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정규직 임금을 빼서 비정규직에게 주는 것도 아닌데 정규직들이 너무 과민반응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들린다. 합리적인 지적이지만 정규직의 ‘진정성’을 과소평가한 것이기도 하다. 들불처럼 일어난 정규직들은 금전적 손해 때문에 저러는 게 아니다. 정말 사무치게 억울해서 저러는 것이다. 저것은 이기심의 발로라기보다 어떤 ‘정의감’에 기인한 것이다.

그 정의감은 능력이나 자격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는 확신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로마법 대전>에 표현된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suum cuique tribuere)이라는 오랜 신조에 대한 믿음이다. 이들에게 정규직은 단순한 직능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획득 신분’이며, 피땀 흘려 노력하고 금욕하고 투자한 대가로 주어진 ‘방어력 강화된 갑옷’이다. 그런데 ‘공정한 경쟁’을 통과하지도 않은 비정규직들이 나와 같은 갑옷을 입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부정의요 불공정이고 무임승차가 아닌가!

건조한 사실부터 적어보자. 정규직은 ‘획득 신분’ 같은 게 아니라 노동자가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 지위다. 사회가 이상해서 정규직이 상위 지위, 비정규직이 기본 지위처럼 되어버렸으나 그것은 사회의 잘못이지 비정규직의 잘못이 아니다.

비정규직은 그 정의상 지위의 불안정성에 대한 반대급부로 단위 시간당 임금을 더 많이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지위도 보장받지 못하면서 임금도 훨씬 적게 받았다. 어려운 가정환경이나 불운 등으로 인해 정규직 시험을 준비할 여건이 못 되는 이들은 비정규직으로라도 빨리 취업해야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쉽게 취업했다는 점을 고려해도, 다른 시장행위자와 비교하면 무임승차라기보다 오히려 ‘할증승차’에 가깝다. 따지고 보면 정규직 역시 ‘고작’ 정규직이 되려고 제법 많은 비용을 치러야 했으니 할증승차자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할증승차자다. 무임승차자는 따로 있다. 이렇게 노동자들끼리 ‘의자 뺏기’ 싸움을 하게 만든 장본인들, 그 이익을 쏙쏙 빼먹어온 자들, 그들이 바로 진짜 무임승차자인 것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서부지법 폭동 군중의 증오는 만들어진 것이다 [박현 칼럼] 1.

서부지법 폭동 군중의 증오는 만들어진 것이다 [박현 칼럼]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2.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사설] 김용현 궤변 속 계엄 찬성했다는 국무위원 밝혀내야 3.

[사설] 김용현 궤변 속 계엄 찬성했다는 국무위원 밝혀내야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4.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분노한 2030 남성에게 필요한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5.

분노한 2030 남성에게 필요한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