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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오늘의 기독교 묵상 / 김지훈

등록 2018-01-07 18:12수정 2018-01-07 19:02

김지훈
책지성팀 기자

“오늘날 사탄은 부모에게서 청년을, 남편에게서 아내를, 주님에게서 교회를 독립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지인으로부터 그가 다니는 교회 목사가 ‘오늘의 묵상’이라며 쓴 글을 받았다. 이 목사의 ‘묵상’에서 인용한 성서 본문은 히브리 성서(구약) 중 <에스더서>의 서두에 나오는 와스디 왕후의 이야기였다.

주전 5세기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로 추정되는 아하수에로 왕 즉위 3년. 왕이 모든 귀족과 신하들을 불러모아 180일 동안 성대한 잔치를 열고, 그 잔치가 끝난 뒤 다시 7일간 도성에 있는 백성들을 왕궁 안뜰로 불러 잔치를 열었다. 잔치 마지막날 왕은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져 와스디 왕후를 불렀다. 왕후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왕후는 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왕에게 가지 않았다. 성서에서는 왕후가 이를 거절하는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성서에 왕후가 부인들끼리 잔치를 열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왕후 역시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한 상태로 배짱을 부렸다든지, 잔치를 오래 치르느라 피곤했다든지 추측만 해볼 뿐이다.

이 본문을 가지고 목사는 마치 세계의 종말이 찾아온 것처럼 현대사회를 비판한다. “와스디는 한 사람의 아내로서 왕이 춤추라고 하면 춤추고, 오라고 하면 순종하면 됩니다. 오늘날 ‘해방이다 자유다 민주화다'라는 말만 내걸면 나이든지 성별이든지 상관없이 그저 막무가내로 날뜁니다! 질서가 다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혼돈의 세력을 분별하려면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쪼개 주어야 합니다!”

사실 이 목사의 해석은 성서 해석의 기본원리를 무시했다는 점은 둘째 치고 글쓴이의 국어 실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만 드러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하수에로의 명령, 페르시아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식의 논리 전개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건 마치 예수를 매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로마인들처럼 범죄자들을 극형에 처하지 않아 현대사회에 범죄가 늘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더 근본적으로 <에스더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믿음과 타국에 포로로 끌려간 모순적인 상황에서 신앙과 민족적 동질감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 승리’를 목적으로 창작됐을 짧은 이야기다. <에스더서> 전체 이야기는 페르시아 땅에서 유대민족을 멸절하자는 한 신하의 청을 아하수에로가 승인하는데, 유대민족 출신의 새 왕후 에스더가 이를 저지해 대반전을 일으키는 내용이다. 일 년 중 하루를 정해 유대민족을 죽이려 했던 이들의 일가족을 몰살하고 재산을 빼앗을 수 있게 했다는, 현대인의 관점에선 문제적인 대목도 있다. 이런 성서를 2000년간 섬세히 발전해온 기독교신학 체계의 도움 없이 읽고 해석하는 목사와 신도들의 태도는 무지하고 무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국 개신교의 특징 중 하나인 이런 반지성주의는 사회 전체적으로는 악영향을 끼치고, 자신들의 존립도 위태롭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는 맞불집회 참여를 독려했고, 어떤 목사들은 집회에 나와 대형 십자가를 이끌고 퍼레이드를 벌였다. 장로교회 중 세계 최대 규모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는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면서도 담임목사직을 아들 김하나 목사에게 세습해 일부 교인들마저 반발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와 반지성주의의 관계,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서 다룬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존 셸비 스퐁의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를 권한다.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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