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들>이라는 문학계간지가 있다. 광주지역에서 출간되는 종합문예지로 이번에 통권 50호를 맞았다. 이 잡지를 읽다가 흥미로운 한 편의 문학평론을 발견했다. 문학평론가 김미정이 쓴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이 그것이다. 이 글에 흥미를 느꼈던 것은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문학평론가들의 다소는 냉정한 ‘미학적 평가’와 독자 대중의 ‘열광적 지지’ 사이의 비대칭성의 의미를 해명하고자 하는 의욕 때문이었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작품에 대해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일단 이 작품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소설과 르포의 중간”, “소설이 아닌 다큐”, “계몽적인 작품”, “수필이며 르포이며 일기 같은 글”, “소설적 해석과 전망 제시”의 “아쉬움” 등을 표명했다고 한다.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는 주목할 만하지만, ‘미학적 완성도’ 면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식의 평가일 것이다. 반면 독자들은 이 소설의 출현에 열광하면서, “내가 김지영이다”와 같은 공감은 물론 이제껏 대변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희열을 느낀 결과, 소설 속 주인공에게서 실제의 ‘자기’를 발견한 듯한 ‘당사자성’을 확인한 것 같다고 김미정은 서술한다. 문학평론가와 독자 대중 사이의 이러한 평가의 양극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그것을 해명하려는 것이 김미정의 분석이 공들이는 부분이다. 김미정의 평론을 읽으면서 내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도덕적·윤리적 관점에서 사회성이 짙은 작품들을 일률적으로 평가·분석하는 관성 역시 큰 한계를 지닌다는 지적이었다. 페미니즘이나 젠더 의제와 관련된 최근의 논의에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이, 정치적 올바름 일반으로 정체성, 권력, 억압, 차별 등의 문제를 분석·해체하는 것은 어렵다. 이것은 차라리 ‘정체성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고, 일련의 정체성 투쟁이 더 크고 거대한 구조적 모순과 연관되어 있다는 시각을 동시에 견지하는 게 타당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이 작품에서 ‘당사자성’을 확인하는 것을 더욱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 역시 꽤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 더구나 최근의 독자들이 ‘고유한 자기’로 명명할 수 있는 작가들의 자기표현이나 내면의 고백 등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자아표현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 “불쾌”를 느낀다는 분석에서는 산뜻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된다면 장구한 시간 동안 지속되어온 ‘고백의 기술’로서의 문학의 존재 근거는 상당 부분 약화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 지평이 “고유한 자기”의 확인이 아니라 “정보전달 기능”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진단 역시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일본문단의 사례를 들고, 한국에서는 장강명이나 조남주의 소설이 그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정보전달 기능”이 중요하다면, 논픽션에 비해서 픽션 양식이 오히려 주변화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분명해 보이고, 전통적인 소설 양식의 쇠퇴는 잠재적으로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나는 이런 의문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정보전달을 위해서 소설을 쓰거나 읽는 일은 사실상 비효율적인 것이 아닐까. 소설이라는 매개나 변형 없이 직접적인 서술을 통해 정보전달을 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여지는 문학은 무엇이며, 독자란 누구인가. 어렵지만 의미 있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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