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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어렵게’라는 단어 / 허문영

등록 2017-12-22 17:40수정 2017-12-22 19:20

허문영
영화평론가

올해에도 누군가의 부고가 일상의 소식이 된 삶을 살았다. 그중 몇 사람은 내가 친밀하게 느끼는 이였고 그의 죽음이 너무 이르고 너무 어처구니없어, 아직도 그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애도 의례를 치른다. 그의 죽음을 의미 있는 부재로 등록해 상실감을 치유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애도 의례는 너무 단출해져, 내 감각은 그의 부재를 아직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 같다.

한 해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며, 또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다. 친분도 안면도 없어 일정한 거리감이 있고 그 때문에 오히려 이제, 명복을 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1947년 9월3일에 태어나 올해 8월28일에 돌아간 가수 조동진이다. 나와 같은 1960년대 세대에게 노래를 짓고 부르던 조동진은 강하지 않지만 오랜 이명을 남긴 음악인이었다. 대중음악평론가 신현준은 조동진에 대해 “고통을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심리치료사처럼 상처받은 많은 영혼들을 어루만져주었다”고 썼다.

수줍은 듯 낮게 읊조리는, 그리고 어딘지 불안한 그의 목소리는 결코 능숙한 가수의 발성이 아니었지만,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었다. 그가 티브이 가요프로그램에 나와 어색한 몸짓으로 ‘작은 배’를 부르던 1979년의 희귀한 장면을 기억하고, 버스를 타고 가다 ‘나뭇잎 사이로’를 듣고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한 느낌을 가졌던 것도 기억한다. 그리고 한 여인에게 ‘제비꽃’을 불렀던 것도 기억한다.

라디오 음악프로에 손님으로 나와 진행자를 진땀 빼게 할 정도로 말을 하지 않다가 “좋은 친구는 어떤 친구라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에 한참 망설인 끝에 “좋은 친구는… 좋은 사람이죠”라고 대답하던 너무나 사소한 장면도 기억한다(그때 진행자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대답은 좋은 말이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그의 음악에 대해 별로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사소한 한 가지 때문에 자주는 아니지만 오래 그를 떠올리게 된다. ‘나뭇잎 사이로’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이 노래를 많이 좋아했지만 ‘어렵게’라는 단어만큼은 갓 스물이 된 내게 잘 납득되지 않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노랫말을 쓰던 사람이 더없이 아름다운 이 노래에 왜 저렇게 딱딱하고 평범한 단어를 썼을까.

한동안 잊고 지내던 이 의문이 풀린 건 2000년 2월의 어느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조동진의 공연(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나뭇잎 사이로’를 다시 들었을 때였다. 물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 노랫말이 흘러나왔을 때 ‘어렵게’라는 단어가 다른 단어로 말해질 수 없다고 즉각적으로 확신했을 뿐이다. 마흔이 다 되어서야 ‘어렵게’라는 단순하고 평범한 단어에 울음보다 깊은 한숨이 배어 있다고 비로소 느꼈던 것 같다.

하나의 단어에 담긴 마음에 이르는 데 2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말은 쉽지만 이렇게 어렵기도 하다. 아름답지 않아도 평범하고 단순해 보여도 쓸 수밖에 없는 말이 있다. 좋은 말은 단순하다. 나이를 꽤 먹고서야 단순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조금씩 보기 시작하게 된 것 같고, 단순하지 않은 것에는 전보다 더 많은 의심을 품게 된 것 같다. 조동진은 단순하고 아름다운 노래로 오래전 내 손을 잡아주었고, 이후로도 잊을 수 없는 배움을 주었다. 늦었지만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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