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아이피티브이(IPTV)에 올라 있는 영화 목록을 뒤지다 보면 가끔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제목을 접하고 흠칫 놀라게 된다. 물론 한국에서 개봉되지 않아 보고 싶었지만 보기 힘들었던 영화들이다. 그중 두편을 소개하고 싶다. 하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브리지>(1973)이다. 세르조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 3부작의 주연으로 톱스타 반열에 오른 이스트우드는 기묘한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를 연출해 감독으로 데뷔한다. 두번째 연출작으로 호러에 가까운 음산한 서부극 <평원의 무법자>(1973)를 만든 직후 내놓은 세번째 영화가 <브리지>이다. 부유하지만 외로운 초로의 남자(윌리엄 홀든)와 앳된 히피 여인(케이 렌즈)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는 관객과 전문가들 모두에게 금방 잊혔다. 첫 두 작품과 달리 이스트우드가 출연하지 않은데다 평범한 로맨스 영화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흥행에선 참패했고, 서부극의 전통을 훼손했다며 레오네 영화와 이스트우드를 함께 비난하던 주류 평론가들 대부분에게 “완벽하게 끔찍한 영화”라는 등의 혹평을 받았다. <브리지>가 ‘저주받은 걸작’과 같은 수사에 어울리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여기엔, 데뷔작에서도 이미 확인된, 이스트우드의 거의 강박적으로 보이는 간결한 터치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사건은 간결한데 세부는 풍성하다. 드라마틱한 순간은 오히려 스치듯 무심히 등장하며, 사건과 중심인물의 감정 표현만큼 주변 인물들과 풍경이 부드럽고 섬세한 표정으로 새겨져 있다. 이 영화를 보면 이스트우드가 초기작들에서부터 고전적 연출기법을 은밀하게 쇄신하면서 자기만의 영화적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삶이 굳어버린 남자와 바람결 같은 여자의 만남이라는 이 영화의 설정을 뒤집은 그의 두번째 멜로드라마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가 나온 건 이로부터 22년 뒤의 일이다. 다른 한편은 프랑스 감독 필리프 가렐의 <뜨거운 여름>(2011)이다. 포스트누벨바그 세대를 대표하는 가렐이 21세기에 만든 8편 가운데 유일한 컬러이며, 역시 68혁명의 유령 그리고 지속되지 못하는 사랑으로 고통받는 연인들을 그린다. 두가지 요소는 21세기의 필리프 가렐을 여전히 사로잡고 있다. 여기엔 저택을 소유한 젊은 화가-배우 부부와 영화 단역으로 어렵사리 살아가는 연인이라는 두 커플이 등장한다. 가난한 연인은 부유한 부부의 집에 얹혀산다. 가난한 남자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은 채 친구에게 기생하고, 부유한 남자는 부르주아를 비난하지만 자신의 부르주아적 삶을 반성하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은 가렐의 최근 영화 중에서 감정의 결이 섬세하고 복합적인 편이다. 고독과 무력, 사랑과 질투, 불안과 의심은 물론이고 굴욕과 수치, 권태와 욕망이 극히 단출한 프레임 내부를 어지럽게 교차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무언가 희박해져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마치 감정들이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는 느낌이다. 가렐의 드문 컬러영화인데도 의연한 것은 사물이고 인물들은 점차 탈색되어간다. 프레임 안에 있을 때 침묵하던 인물들은 카메라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가까스로 입을 연다. 낡은 건물들 그것도 세트장의 모조물들, 간혹 불려나오는 레지스탕스의 기억도 현재와 만나지 못하고 힘없이 부서져간다. 결말은 절망적이지만 그 절망은 일상의 표정을 짓고 있어 더 아득하다. 가렐은 여전히 비명 없이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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