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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자유한국당은 보수의 적이다 / 권태호

등록 2017-11-21 18:23수정 2017-11-21 22:00

권태호
논설위원

오래전 경제부에서 정치부로 옮긴 첫날이었다. 한나라당 중진과 언론사 반장 등 10여명이 모인 점심 자리. 의원도, 보좌관도, 기자도 모두 티케이(TK)였다. 억센 사투리는 덤이다. 경제부에선 경상도 출신 기자들도 억양은 못 없앴지만 표준말을 썼다. 그런데 다른 세상이었다. 지독한 동질성(homogeneity)이 기괴했다.

그래도 당시 한나라당에는 생각은 달라도, ‘꽤 괜찮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선거를 치를수록, ‘어디서 이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종국에는 당을 덮었다. 이젠 자기들끼리 경쟁하듯 무개념 독설이 널을 뛴다. ‘전여옥은 양반이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17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날부터 당사에 걸린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에 대해 말하는 동안 참석자들이 돌아보고 있다. 홍 대표는 지난 10일 보수우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본당으로서 세 대통령의 사진을 당사에 걸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17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날부터 당사에 걸린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에 대해 말하는 동안 참석자들이 돌아보고 있다. 홍 대표는 지난 10일 보수우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본당으로서 세 대통령의 사진을 당사에 걸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최근 한 세미나에서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만났다. ‘제재’와 ‘대화’라는 대북 문제의 상반된 해법을 설명하며 “방법은 달라도, 다들 나라 위하는 마음이란 걸 의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작은 조직에서도 ‘목적’이 같아도, ‘방법’이 다르면 어느새 서로를 증오하게 되곤 한다. 분노는 강력한 에너지원이다. 하지만 남도 나도 피폐하게 한다. 장기화되면 습관이 되고, 사고를 게으르게 만든다.

이 전 장관 말이 ‘외교안보 분야에선 어느 정도 합당할 수도 있다’ 생각했다. 이를 자유한국당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영화 <남한산성>에서, 임금 앞에서 치열하게 논쟁하던 최명길(이병헌)이 눈 오는 날, 김상헌(김윤석)을 찾는다. ‘전란이 끝나면, 대감이 조정으로 돌아가 전하를 지켜달라’고 당부한다. 허구다. 하지만 ‘방법’은 달라도 서로의 ‘충심’은 인정하는 장면이 부러웠다.

한나라당에선 2000년 미래연대, 2004년 수요모임, 2006년 미래모임 등 혁신 모임이 이어졌다. 과거 ‘남원정’이 혁신을 외칠 때, 초·재선이었다. 예전엔 초·재선이라면 ‘당돌함’ ‘버르장머리’가 연상됐다. 이젠 ‘고분고분’ ‘똘마니’가 연상된다.

과거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과 국민연금 제도를 실시했고, 김영삼 정부는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을 확충했다. 대선 때 이명박 후보는 ‘중용’ 이미지를,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강화’를 내걸었다. 진보는 ‘가치’에 천착하지만, 보수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래서 보수는 진보의 가치를 보다 쉽게 빌릴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는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달랐다. 대신 극도의 ‘동질성’ 추구에 몰입했다. ‘친박’도 모자라 ‘진박’까지 했다. 보수는 더 너그러워야 하고, 만나면 푸근해야 한다. 그게 보수의 미덕이다. 그러나 지금 자칭 보수들은 겉으로도 강퍅하고 성마르다. “자고 나면 한 명씩 사라진다”며, ‘정치 보복’ 논란을 일으킨다. ‘불법적’인 일을 ‘정치적’으로 덮어줘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도 있었다. 그게 옳지 않았다.

지금 한국의 보수는 죽어야 산다. <남한산성>에선 “죽어서 살 것이냐, 살아서 죽을 것이냐”를 고민했는데, 지금 보수는 고민도 없이 ‘살아서 죽는 길’을 택했다. 나침반(방향)을 봐야 하는데, 시계(속도)만 본다. ‘박근혜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정치적 이익’만 계산한다. 그게 일부 보수 정치인들이 연명할 길일진 모르나, 보수 전체를 죽이는 길이다.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똥볼’ 차서 감이 떨어지는 ‘내년 봄’은 없다. 2020년이면 절반은 죽는다. 그새 보수의 씨는 말라갈 것이다. 그래서 자유한국당은 ‘보수’의 적이다. 다르다고 미워해선 안 된다. 설령 미워하더라도 예의는 지켜야 한다. 그러나 내가 먼저 ‘예의’ 받을 기본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정치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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