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요즘 정치권과 언론을 가장 뜨겁게 달구는 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보복 악순환론’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공영방송 사영화론’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 가능성, 전직 국정원장들의 잇따른 구속, 김장겸 문화방송 사장 경질 등을 계기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다. ‘권력의 속성은 똑같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임 정권에 대해 보복을 하고, 방송을 정권의 나팔수로 만들려 한다. 지금 권력이 하는 모습을 보면 예전 권력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어떤 이는 입에 거품을 물며 성토하고, 어떤 이는 혀를 차며 비웃고, 어떤 이는 심각한 얼굴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다. 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힘 행사가 과도하지 않은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너무나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자유한국당이나 보수신문들이 펼치는 주장은 그런 범주가 아니다. 전형적인 물귀신 작전이요, 옥석을 섞어서 본질을 흐리는 전략이다. 무엇보다 정치보복론을 펼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조차 의구심이 든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야 ‘양심’을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지난 12일 바레인으로 출국하며 “감정풀이냐, 정치보복이냐”고 문재인 정부를 성토했다. 자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한 것은 정치보복이 아니고, 자신에 대한 수사는 정치적 앙갚음이라고 주장하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이 전 대통령이야 당사자니까 그렇다고 치자. 자유한국당이며 보수언론은 어떤가. 요즘 정치보복론 확산의 선봉에 서 있는 한 신문은 2009년 박연차 게이트 수사 때는 “사건의 본질은 대통령 자신의 비리”라고 사설에서 준엄하게 꾸짖었다. ‘정치보복 악순환’이라는 말 자체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도 한번 따져볼 문제다. 정치보복은 기본적으로 ‘여야 정권교체’의 토양 위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역사를 들여다보면 정치보복 악순환론은 실제로는 매우 부풀려져 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전방위적인 사정작업이 펼쳐졌으나 이를 정치보복이라고 말할 사람은 별로 없다. 김대중 정부는 역사상 첫 정권교체를 하기는 했지만 외환위기 수사 말고는 이렇다 할 사정작업 자체가 별로 없었다. 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의 사정작업에 정치보복의 딱지를 붙이기란 더욱 어렵다. 결국 여야 정권교체 뒤 정치보복의 논란을 부른 시발점은 이명박 정권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였다. 그 기조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결론은 자명하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주장이 최소한의 진정성을 가지려면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한 수사가 정치보복이었음을 먼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만약 이명박 전 대통령이 솔직히 자신의 정치보복 행위를 사과하고 “더이상의 나라의 불행을 막자”고 호소하면 어떨까. 이런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화해든 용서든 화합이든 가능해진다. 문제는 그럴 가능성은 0%라는 점이다. 정치보복 악순환론을 펼치는 사람은 “지금의 행위가 훗날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라고 일갈한다.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렇지만 ‘부메랑’을 의식해 현재의 권력이 행동을 각별히 유의하고 위법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것, 그것도 역사의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최소한 국민의 혈세로 마련한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와 권력실세에게 상납하는 일 따위는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문화방송 김장겸 사장 교체 등을 두고 자유한국당과 일부 보수신문들은 “지난 2008년 정권교체 뒤와 다를 게 뭐냐”고 융단폭격을 쏟아낸다. 형식적 절차의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내용은 완전히 다름을 애써 눈감은 주장이다. 공정방송을 외친 수많은 기자를 회사 밖과 ‘유배지’로 내쫓은 참상은 권력의 공정방송 장악론에는 완전히 사장돼 있다. 공정방송을 그토록 염원하는 보수신문들에 하나만 묻고 싶다. 암 투병을 하는 이용마 기자를 비롯해 해직·유배의 고초를 겪어온 동료 기자들한테 같은 언론동네 식구로서 언제 한번 온정의 눈길이라도 보낸 적이 있는가. 예전에 ‘민나 도로보데스’(모두가 도둑놈이다)라는 일본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요즘 범람하는 정치보복론은 바로 ‘권력은 모두 도둑놈들’이라는 말이다. 그런 프레임으로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리고, 권력에 대한 혐오감과 정치적 허무주의를 조장한다. ‘민나 도로보데스’를 외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도로보’는 아닐까.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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