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구촌의 보편적인 정치 주체인 국민국가가 바로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만들어졌다. 경쟁이 격심했던 16~19세기 유럽 정치의 산물로 국민(Nation)을 모체로 한 근대 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선이 주로 민족을 따라 그어져 이들이 국민으로 등장했기에 국민국가는 민족국가이기도 하다.
국민국가의 앞날과 관련해 동아시아에서 주목되는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에는 이미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여러 지방이 있다. 중국은 이와 관련한 평화적 논의를 보장하는 민주적 제도를 갖고 있지 않다. 앞으로 중국이 자신의 바람대로 선진 강대국이 된다면 새 차원의 분리독립 문제가 부각될 것이다.
헌법이 없는 게 국제관계의 특징이라지만, 민족자결주의는 유엔헌장 등을 통해 국제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족자결이 처음 보편적인 원칙으로 분명하게 제시된 때는 1차대전 종전을 앞둔 1918년이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전후 처리를 위해 내놓은 이 원칙은 “피지배 민족(Nation)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일제 치하의 우리는 이 원칙에 기대를 걸었다가 쓴맛을 본 나라 가운데 하나다. 적용 대상이 패전국인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튀르크제국과 전쟁 중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제국의 영토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원칙은 꿋꿋하게 살아남아 국제정치를 움직이는 한 축이 됐다.
최근 분리독립 주민투표 이후 중앙정부와 충돌하고 있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국내총생산의 20%를 차지)의 움직임도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이곳에서 2006년 선포한 자치법령은 자신을 행정적 자치단위를 넘어 독자적인 국가(Nation)로 규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스페인 헌법재판소는 2010년 나라의 통합성을 저해한다며 위헌으로 판결했으며, 이번에도 독립국 선포는 무효라고 했다. 최근 재정 통제권 등 지방정부의 권한 강화를 묻는 주민투표를 한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등 이탈리아의 북부 2개 주(국내총생산의 30%를 차지), 2014년 주민투표를 했으나 부결된 영국 스코틀랜드(국내총생산의 10%를 차지)에서도 비슷한 분리독립 움직임이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현재 지구촌의 보편적인 정치 주체인 국민국가가 바로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만들어졌다. 경쟁이 격심했던 16~19세기 유럽 정치의 산물로 국민(Nation)을 모체로 한 근대 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그 동력에는 몇 가지 바탕이 있다. 우선 군사·안보적인 측면이다. 끊임없는 외부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각 경쟁 주체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중세의 계급 질서에서 벗어나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신흥 부르주아의 입지를 보장해줘야 할 정치적 이유도 국민국가 출현의 배경을 이룬다. 또한 강한 집행력을 통해 대외 확장과 경제 번영을 꾀하는 제국주의 경쟁은 그 자체가 유럽 국민국가의 한 속성이었다. 이들 이유에 못잖게 중요한 것은 정체성 정치다.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선이 주로 민족을 따라 그어져 이들이 국민으로 등장했기에 국민국가는 민족국가이기도 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는 이전 다른 형태의 국가보다 통합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이는 유럽 국민국가들이 이후 많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강화해 지구촌 전체에 복제품을 수출하는 데 성공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현재 국민국가로 꼽히는 나라 수는 2차대전 이전과 비교해 4배나 된다.
그런데 이제 무엇이 달라졌기에 국민국가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분리독립 움직임이 잇따르는 걸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세계화의 영향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활발하게 진행된 세계화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세계 경제와 국제사회를 만들어냈다. 성공적인 초국가 모델로 꼽히는 유럽연합(EU) 자체가 그 산물이다. 그 속에서 한 나라 안에서도 잘 적응하는 지방과 그러지 못한 지방의 차이가 벌어졌다. 거기에다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탄탄한 대도시를 둔 지방은 국가를 통하지 않고서도 지구촌 전체와 소통할 수 있게 됐다.
복잡한 정치적 절차를 따라야 하는 중앙정부는 이런 세계-지방화(글로컬리제이션)에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중앙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는 지방의 목소리를 키우면서 갈등을 만성화한다. 경제·사회적으로 앞서가면서 새 시도가 끊임없이 이뤄지는 카탈루냐와 롬바르디아·베네토 등에서 분리독립 목소리가 큰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근대 국가의 주요 동력이었던 군사·안보 위협이 줄어든 것도 국민국가의 원심력을 키운다. 분리하더라도 안보 위협 없이 더 잘 살 수 있다는 주장은 서구에서 지난 수십 년간 유지된 평화를 생각할 때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여기에다 ‘우리끼리’라는 오랜 정체성 정치가 갈수록 세를 키운다. 이는 주류 민족이 소수민족들을 강제 포섭한 서구 국민국가의 원죄 같은 것이기도 하다. 옛소련과 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 등이 냉전 종식과 함께 여러 나라로 분리된 데 이어 서유럽 나라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자는 권위주의가 민주주의로 바뀌는 정치 전환과 함께한 반면, 후자는 민주 국가 안에서 이뤄지는 탈근대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모든 분리독립 움직임에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해 대중을 결집하는 포퓰리즘적 요소가 있다. 이런 면에서는 이민·난민 문제를 부각해 유럽 전역에서 세를 키워가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와 닮은 면이 있다. 물론 분리독립 움직임은 주민들의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점에서 더 역사적이고 근원적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각 주체의 인식과 실천에 달렸다.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힘을 앞세우는 것이다. 스페인의 경우 분리독립을 밀어붙이는 카탈루냐 쪽이나, 충분한 고민 없이 강경 대응을 앞세우는 중앙정부 쪽이나 모두 문제가 있다. 강 대 강 대결은 피를 부르게 마련이고, 대결 상태가 일단 고착되면 원심력이 더 커지는 쪽으로 가는 법이다. 이런 면에서는 민주 절차를 통해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문제를 봉합한 영국의 경우가 더 돋보인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든 국민국가를 약화하는 역사적 힘이 사라지지 않는 한 분리독립 문제는 유령처럼 유럽 대륙을 떠돌 것이다.
국민국가의 앞날과 관련해 동아시아에서 주목되는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에는 이미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여러 지방이 있다. 중국은 이와 관련한 평화적 논의를 보장하는 민주적 제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스페인 정부 이상으로 힘을 앞세운다. 이 사안이 아직 충분히 완성되지 못한 국민국가의 불안한 구조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이 공산당 독재를 쉽게 완화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앞으로 중국이 자신의 바람대로 선진 강대국이 된다면 새 차원의 분리독립 문제가 부각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럽이나 중국과 비교해 상황이 다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성립시킨 외교·안보, 정치, 경제, 정체성 관련 동력이 모두 약하지 않다. 1천여 년 전 후삼국시대 이래 어떤 지방이 나라를 만들려고 한 시도도 없었다. 하지만 남북한이 원하지 않는 분단을 어쩔 수 없이 지속한 게 아니라 사실상 분리독립 쪽으로 움직여온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계속되는 안보 위기는 통일 동력을 키우기보다 상대를 적대하기 위한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경제적 분리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막는다. 정체성 면에서도 민족사적 동질성보다는 정치·이념적 이질성이 더 강조되는 일이 되풀이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국가 형성이라는 과제를 당위로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로운 분리 공존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탈근대적 접근이 통일 담론에서 일정한 몫을 차지한다.
국민국가는 절대적이지 않다. 능력 있는 개인은 지금도 국가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국민국가가 꼭 모든 구성원에게 좋은 삶의 조건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를 오랫동안 해온 유럽 나라들은 이를 잘 안다. 커지는 분리독립 목소리는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국민국가를 초월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무너진 하늘을 여와가 기웠다는 중국 고대의 신화가 있다. 폐기 여부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국민국가의 역사성·효용성이 침식된 게 아니라면 고쳐서 쓰면 된다. 그 핵심은 민주주의와 평등, 번영과 고통을 함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치구조다. 스페인은 여기서 실패하고 있고 영국·이탈리아 등은 그 경계선에 있다. 내용을 잘 채우지 않으면 어느 나라든 분리독립이라는 난제에 부닥칠 수 있는 게 지금의 지구촌이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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