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규
논설위원
6월항쟁 종착지는 개헌이었다. 4·19도 개헌으로 매듭지어졌다. 헌법은 법이면서 동시에 정치다. 정치의 최고 결실물이 헌법이다. 많은 헌법에 영감을 준 인권선언 채택은 프랑스혁명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촛불혁명’은 아직 혁명 아니다. 새 헌법을 갖지 못하면 미완일 수밖에 없다.
개헌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떤 정치세력도 개헌을 대놓고 반대하지 못한다. 촛불과 탄핵을 거치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권력 분산, 기본권 강화, 지방분권이란 큰 방향도 잡혔다. 임기 초반부터 ‘개헌 드라이브’를 건 집권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이고, 정세균 국회의장의 개헌 의지도 누구보다 강하다. 30년 만에 맞은 최고의 개헌 기회다.
그런데 개헌을 가로막는 돌발변수가 등장했으니 바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느닷없는 변심이다. 홍 대표는 대선후보 시절 “내년 6월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하자”고 외쳤다. 그러더니 최근엔 개헌을 지방선거 이후로 미루자고 발을 빼고 있다. 개헌이 부각되면 야당의 정권심판 이슈가 희석되고 투표율이 치솟아 지방선거에서 불리하다는 셈법 때문일 거다. 계산기를 잘못 두드렸다. 개헌 저지 의석을 너끈히 확보한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면 개헌은 불가능하다. 국회 개헌특위 이주영 위원장도 자유한국당 몫이니 홍 대표가 얼마든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개헌 주역으로 헌정사에 이름을 새기며 자유한국당의 구린 이미지를 털어낼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대선후보 시절에 내년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실시하자고 공약한 홍보물
홍 대표가 판을 잘못 읽어 개헌을 계속 외면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문 대통령은 지난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회가 개헌안을 못 내면 정부가 자체 개헌특위를 설치해 개헌안을 마련할 수 있다”며 ‘대통령 발의 개헌카드’를 꺼냈다. 그러면서 “어쨌든 내년 지방선거 시기에 개헌을 하겠다는 것은 틀림없이 약속한다”고 매우 단정적인 어법을 썼다. 그냥 허투루 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여당 최고위급 당직자도 “국회 개헌안이 무산되면 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할 것”이라고 전했다.
물론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해도 국회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개헌열차를 멈춰세울 힘이 있다. 하지만 개헌이 문턱에서 좌초된 책임은 홍 대표와 자유한국당이 몽땅 뒤집어써야 한다. 홍 대표는 ‘당리당략에 눈멀어 대한민국 미래를 지방선거 한판 승부와 엿 바꿔먹은 사람’이란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문 대통령이 권력구조를 제외하고 기본권과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개헌안을 냈는데도 부결하면 어떻게 될까. 지역정치권과 지역언론의 분노가 폭발해 ‘홍준표 심판론’이 지방선거 최대 이슈로 떠오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소탐대실, 교각살우의 치명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홍 대표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개헌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도권을 행사하거나, 아니면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은 ‘청와대발 개헌열차’를 만나 자기가 놓은 덫에 빠지거나 둘 중 하나다. 개헌열차 운전석에 앉을 거냐, 열차 떠난 뒤에 손 들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치고수가 아니라도 선택지는 자명하다. 개혁은 제도를 바꾸는 거고, 제도의 정점에 있는 게 헌법이다. 개헌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개헌 없는 개혁은 과거 회귀를 못 막는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적폐’들이 그걸 웅변한다. 개혁을 되돌릴 수 없도록 비가역적으로 제도화하는 것, 이것이 개헌의 본질이요 촛불의 명령이다. 진보, 보수를 떠나 지금은 개헌이 최고의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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