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
책지성팀 기자
지난달에 일주일 동안 아내와 하와이로 휴가를 다녀왔다. 21일 토요일 아침에 호놀룰루에 도착해서 호텔에 짐을 푼 뒤에, 배를 채우기 위해 바로 호텔 앞에 있는 식당으로 나갔다. 계란프라이를 얹은 하와이식 햄버그스테이크인 ‘로코모코’를 시켜서 신나게 먹고 있는데, 식당 밖 대로에서 사람들의 환호성과 노래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건물 2층에 있는 식당에서 거리를 내다보니, 심상치 않은 옷을 입고, 무지개 깃발을 펄럭이며 행진하는 행렬이 보였다. 퀴어 퍼레이드였다.
얼른 식사를 마치고 내려가니 긴 행렬이 아직 중간 정도를 지나고 있었다. 수영복만 입고 오일을 발라 번쩍이는 근육질 몸을 드러낸 게이가 트럭 위에 올라 노래를 부르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나도 손을 들어 화답해줬다. 진한 화장으로 여장한 ‘드래그 퀸’이 군악대와 함께 하와이의 중심가인 칼라카우아 대로를 뚜벅뚜벅 행진했다. 트럭 위에 놓인 소파에 앉아 긴 속눈썹을 붙이고 손과 머리 동작만으로 요염함을 표현하는 한 과체중 게이는 실로 압권이었다. 물론 한국에서처럼 이들을 따라다니며 저주를 퍼붓는 보수 기독교단체 회원들 같은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길가에 서 있는 나 같은 시민, 관광객들에게 립밤과 초콜릿 등을 선물로 나눠줬는데, 도저히 공짜라곤 없는 자본주의의 나라 미국에서 느낀 작은 환대의 순간이었다.
지난달 21일 하와이 호놀룰루 칼라카우아 대로를 행진하는 ‘호놀룰루 프라이드 퍼레이드’ 참가자들이 후원사 알래스카항공의 로고가 적힌 펼침막과 비행선을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십년 넘게 해오는 게이 퍼레이드를 굳이 쓴 건, 이 퍼레이드에선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퍼레이드 행렬 대부분이 특정 회사의 이름을 앞세우고 있었다. 하와이안항공, 셰러턴호텔, 우버, 메이시스백화점 같은 기업 로고가 적힌 펼침막이 각 행렬의 선두를 이끄는 트럭의 머리를 장식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이날 퍼레이드의 정식 명칭은 ‘호놀룰루 프라이드 퍼레이드’. 장장 10일 동안 파티와 영화 상영 등 다양한 행사가 이어지는 하와이에서 가장 큰 퀴어 축제의 행사 중 하나였다. 후원사는 42개로 대학이나 기금 등 4곳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기업이었다.
한국은 어떨까? 2000년부터 시작한 퀴어문화축제는 이제 18회를 맞을 정도로 나름의 역사가 긴 행사인데, 스폰서를 찾아보니 기업의 이름을 찾기가 힘들었다. 퀴어문화축제의 프리미어스폰서는 ‘이반시티’라는 인터넷 엘지비티 커뮤니티이고, 다른 4개 스폰서도 동성애자 에이즈 예방홍보교육사업센터 ‘아이샵’, 동성애자 웹툰사이트 ‘까만봉지’ 등 대부분 성소수자와 관련된 일을 하는 기관, 단체들이다. 퀴어 퍼레이드를 하면 보수단체와 기독교단체에서 쫓아와 맞불시위를 하는 한국에서 까딱하면 불매운동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 기업들이 선뜻 후원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언젠가 화려하게 차려입은 성소수자들을 회사 로고를 붙인 트럭 위에 태워서 퍼레이드에 내보내는 기업이 나타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몽상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위에 언급한 기업들은 성소수자들을 유치하는 것이 중요한 수입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자녀를 낳아서 기르고, 결혼시키고, 유산을 남겨줄 필요가 없는 성소수자들은 소비 성향이 더 강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퍼레이드에 참여해 성소수자 고객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것일 뿐 아니라 수익에도 적잖게 도움이 된다는 계산이 나오는 이유다.
이 이야기를 한겨레출판사의 편집자들과 함께한 저녁 술자리에서 했는데, 대뜸 한 편집자가 “한겨레도 회사니까 한겨레가 먼저 해봐요”라고 말하더니 “김 기자님이 드래그 퀸을 하면 되겠다. 드래그 퀸이 요즘 매우 잘나가는 유행”이라고 치고 들어왔다. 그 말을 듣고 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쳐다봤다. 그때 ‘저는 이성애자라 진지하게 드래그 퀸을 하는 게이분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서’라고 변명을 해야 했는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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