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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시진핑과 건륭제 / 이본영

등록 2017-11-07 18:29수정 2017-11-07 19:06

이본영
국제뉴스팀장

대체로 이렇게 흘러왔다. 1777년 영국 시인 새뮤얼 존슨은 “런던이 지겹다면 인생이 지겨운 사람이다. 런던엔 인생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게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6년 뒤, 자긍심이 하늘에 닿은 청의 건륭제는 본격적 통상을 요구하는 영국 왕 조지 3세에게 서한을 보내 “천조(중국)에는 없는 게 없다”며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나무랐다. 중국사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제의 사망 뒤 불과 41년 만에 아편전쟁이 터졌다. 존슨의 말이 건륭제의 호언장담을 누른 격이었다. 청일전쟁, 의화단 사건, 중일전쟁이 이어지면서 중국의 주권과 중국인들의 자존심은 만신창이가 됐다.

앞으로는 이렇게 흘러간다고 했다. 시진핑 주석은 최근 중국공산당 당대회 등에서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통해 ‘중국몽’을 실현하겠다고 했다. “아편전쟁 이후의 능욕”을 언급하며 “어떤 나라도 중국이 자신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쓴 열매를 삼킬 것이라는 헛된 꿈을 버려야 한다”고도 했다. 대장정 기념식도 아닌데 군복을 입고 등장하기도 한다. 풀어 쓰면 이 정도일 것이다. ‘우리는 무적의 강국이었으나 길을 잘못 들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이제 우리가 돌아왔다. 웬만하면 참겠으나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한때 세계 총생산의 30%를 담당했던 중국은 3%대까지 쪼그라들었다가 지난해 15%까지 회복했다. 없는 게 없다던 건륭제의 큰소리는 지금 중국의 생산력이 실현했다.

하지만 냉정히 보자면 시 주석의 역사인식은 부정직하고 시대착오적이다. 외세가 중국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틀림없지만, 내분과 노선 실패의 재앙은 그 어떤 외세가 가한 상처를 능가한다. 3천만~4천만명이 아사해 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불리는 대약진운동은 마오쩌둥이 이끈 공산당이 벌인 일이다. 아편전쟁 직후 태평천국운동으로도 2천만~3천만명이 희생됐다. 국공내전도 말 그대로 내전이다. 외세 탓은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지도자들의 교범이지만 내적 모순과 그로 인한 큰 희생은 외면한다.

봉건왕조의 영광을 무비판적으로 불러내는 것도 퇴행적이다. 부활은 되살릴 과거의 무엇을 전제로 한다. 꿈은 좌절된 욕망이다. 시 주석은 아편전쟁 전, 경제적으로나 영토로나 최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제의 치세 정도를 상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제국 붕괴를 전후해 중국 민족주의자들은 청조를 만주 요괴라고 부르며 역사에서 긁어내려 했다. 공화-공산혁명기에 다수 지도자와 사상가는 모든 과거의 부정만이 살길이라고 외쳤다. 지금 중국공산당은 빛바랜 이념의 헛헛한 빈자리를 ‘제국의 영광’으로 채우려 한다. 시 주석은 건륭제가 독서실로 쓴 자금성 삼희당에서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차를 마신다. ‘중국은 안 만드는 게 없는데 뭘 더 사란 말이오’라는 메시지일까? 자신이 건륭제의 영광을 승계한다는 은유를 풍기려는 걸까?

시 주석은 새 지도부와 함께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 상하이에서 입당선서를 재연하며 초심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면 초기 중국공산당의 국제관계론도 새겨볼 일이다. 리다자오와 함께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천두슈는 100여년 전 이렇게 썼다. “우리가 백인들에게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려면 먼저 같은 황인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중국의 특수한 지위라든가 조선에 대한 주속관계(주종관계)를 타파하지 못하면 무슨 낯으로 그런 요구를 하나.”

중국 지도부의 누군가는 사드 보복을 보며 향수를 느꼈을지 모른다. 장성 밖에 양떼를 몰고 와 거래를 청하는 유목민들을 봐주고 싶으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혼내는 청조의 만용을 떠올리며 말이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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