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에디터 탈원전의 지난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일반소비세(부가가치세) 도입의 역사가 겹쳤다. 한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 인식을 바꾸는 일이 녹록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돼서다. 이젠 상품이나 서비스를 살 때 붙는 부가가치세에 시비를 거는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새로운 표준’이 되기까지 순탄한 길을 걸어온 건 아니다. 그 전까지의 소비세는 기껏해야 담배·술, 사치품, 일부 공산품 거래를 대상으로 삼았다. 이를 거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로 확대하는 건 국민 부담 증가와 직결되는지라 거센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그중에서 세금 부담 능력이 떨어지는 저소득층의 불만이 가장 컸다. 아이디어가 탄생한 지 40년 뒤인 1954년에야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이 세금은 130여 나라에 도입됐다. 스웨덴의 사례는 부가가치세 도입을 둘러싼 저항과 설득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30년대 복지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스웨덴은 20여년이 지나면서 재정 수요가 급증했다. 소득세 인상만으로는 복지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사민당 정부는 부가가치세로 눈을 돌렸다.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군나르 스트렝은 ‘일하는 사람을 위한 복지국가’가 지속되려면 노동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노동조합의 반발에 부닥쳤다. 세금이 부족하면 부자들 호주머니를 털 일이지 왜 ‘서민 증세’를 하느냐는 논리였다. 보수정당은 세금을 쉽게 걷으려는 꼼수이자 늘어난 세수로 복지를 확대하려는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여론조사 결과 역시 반대가 압도적이었다. 스트렝은 소신을 꺾지 않았다. ‘소비는 부자가 더 많이 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보다 세금을 더 내게 된다’ ‘당장은 저소득층의 부담이 늘겠지만 걷힌 세금을 저소득층한테 더 쓰면 결과적으로 유리하다’는 논리를 댔다.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자료를 만들어 캠페인을 벌이고 본인이 직접 지역 정당 행사나 노동조합 모임에 참석해 도입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더디지만 끈질긴 5년여간의 설득 끝에 충분한 지지자를 확보했고 1959년 법안을 통과시켰다. 스웨덴은 그렇게 늘어난 세수로 가난한 이들이 자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주택, 교육, 건강 관련 서비스를 값싸게 제공했다. 도입 당시 4.9%였던 세율은 이제 25%에 이른다.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재개’를 택한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의 결정은,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가치관의 재설정’이 우호적인 정치 환경이나 구호의 선명함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한 시민참여단은 “재개 입장이 우세했던 것은 중단 쪽에서 피부에 와닿지 않는 데이터를 계속 보여줬고, 뚜렷한 대안 없이 신재생에너지가 만능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해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하지 못한 거 같다. 또 재개 쪽은 생업이 걸린 문제라 절박한데, 중단 쪽은 상대적으로 준비를 덜 한 것 같다”고 했다. 스트렝의 부가가치세처럼 변화가 가져올 삶과 생활의 긍정적 요인들을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또 주목할 부분은 시민참여단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많아지고, 토론이 이어질수록 ‘중단’과 ‘재개’의 격차가 벌어진 사실이다. ‘끝장 토론’에서 토론자의 준비 미숙이 드러나듯 숙의 과정에서 탈원전 담론의 미숙함과 부실함이 노출된 것일 수 있다. “희망은 진보의 연료”라고 했던 영국 노동당 토니 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처음엔 무시당하던” 탈원전 주장은 이제 “미쳤거나 위험하다”는 비판을 막 넘어섰다. 탈원전 지지자들이 주류 담론을 극복할 설득력 있는 대항 논리를 완성해야 “더는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다.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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