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실장
결국 모든 건 불신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1년 전 서울 중심가에 켜진 촛불이 대통령을 쫓아내는 거대한 물결로 번진 건, 정부와 정당 그리고 국회를 믿지 못했던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의 결과였다. 문체부가 이름 없는 대통령 측근을 위해 헌법 가치를 깡그리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검찰이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의 비리와 불법에 눈감지 않았다면, 아무리 대통령이 무능하고 퇴행적이라 해도 촛불이 그렇게 들불처럼 번지진 않았을 것이다.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의회민주주의를 조롱한 대통령에게 조금이라도 저항했다면, 야당이 국정 난맥을 훨씬 결연하고 날카롭게 파고들었더라면 대통령이 중도 퇴진하는 사태까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12월9일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건, 국민의 뜨거운 열기에 떠밀린 측면이 컸다.
1년이 지난 지금, 그 ‘불신’은 얼마나 사라졌을까. 새 대통령이 뽑히고 여당과 야당이 자리를 맞바꿨다고 해서 기성 정치와 정당, 의회를 향한 국민의 믿음이 저절로 생겨나진 않는다. 촛불의 지향과 목표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촛불이 왜 일어났는지 그 배경을 살피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기성 제도가 국민 뜻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뢰를 상실할 때 촛불은 이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시민 참여를 제도적으로 확대하지 않으면 그와 같은 폭발적 현상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변화 요구의 중심엔 국회가 있다. 5월9일 대통령선거를 통해 정부는 바뀌었지만 국회는 그대로인 탓이다. 정권교체가 정부 운영 방식의 변화로까지 이어질지는 매우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기대를 가질 수는 있다. 이에 비해 과거와 똑같은 체제의 국회는 변화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처럼 비친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대표는 “국회를 바꾸려면 국민의 뜻이 정확하게 의석수에 반영되도록 선거제도를 고쳐야 한다. 전국 득표율과 의석수가 일치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0%를 갓 넘기는 득표를 한 정당이 전체 의석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거나, 10% 가까운 지지율의 정당이 1~2석에 불과한 현 제도의 모순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민심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제도를 갖는 것, 그것이 정치를 바꾸는 첩경”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승수 대표는 연말까지 가동하는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선거법 개정을 먼저 하자고 주장하지만, 이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촛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선거법이나 헌법 개정은 여전히 ‘정치인들의 영역’에 속한다.
국민소환제나 국민발안제, 국민투표(또는 공론조사)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미 국회엔 국회의원 소환제를 담은 법안이 제출돼 있고, 국민이 직접 법안을 발의하는 국민발안제 역시 여야 모두 총선과 대선에서 여러 차례 공약으로 제시했다. 겉으로 보면 입법화는 시간문제일 것 같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국회 헌법개정특위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학)는 “가령 국민소환제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소환 주체를 지역구민으로 할 건지 전국민으로 할 건지, 국민발안제는 국민이 발의한 법안의 국회 심의 권한을 어느 정도로 제한할 건지 등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의견이 다양하게 갈린다. 이런 부분이 제도 도입의 발목을 잡는다”고 말했다. ‘세부 방식의 차이’는 논의를 통해 충분히 수렴할 수 있다. 그것이 국민 참여를 확대하는 제도의 도입을 제한하는 족쇄로 작용할 수는 없다.
국민의 직접 참여를 확대하는 방식이 대의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포퓰리즘을 강화할 거란 우려가 있다. 포퓰리즘을 걱정하기엔 지금 우리 정치는 국민과 너무 멀어졌고, 신뢰를 잃었다. ‘최악’으로 꼽힌 박근혜 대통령조차 집권 시기 국회와 충돌할 때엔 국민 다수가 대통령 편에 섰던 걸 기억해야 한다. 정치 불신, 의회와 정당에 대한 불신을 ‘협치’나 ‘국회 선진화’와 같은 좋은 말로 치유하기엔 너무 늦었다.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나름 성과가 있지만, 여야 합의로 개혁을 하다 보니 그 범위가 ‘정치권이 합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한된다. 지금은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여야 합의’보다 ‘국민이 바라는 것’이 먼저다. 정치개혁의 주체는 국회가 아니라 국민이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변화를 가져오고 의회의 신뢰를 되살릴 수 있다. 훨씬 열린 자세의 국회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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