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이번 나의 귀향은 오로지 고향과 작별하기 위해서 왔다.” ‘나’의 이름은 쉰(迅). 40대 초반의 남성.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났다. 세속적 견지에서는 명백한 실패자다. 고향의 가계도 몰락해 가산을 정리한 후 홀어머니와 조카를 데리러 귀향한 인물이다. ‘나’는 루쉰(魯迅)의 소설 <고향>(1921)의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이면서, 작가의 초상이 어른거리는 인물이다.
시인 이육사가 루쉰의 <고향>을 번역한 것이 1936년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가장 오랫동안 읽어온 중국 현대소설이 이 작품인 셈인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은 명절이랄지 귀향이랄지 하는 상황 속에서의 보편적 복합감정을 유려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시간적 배경이 추석이냐 소설 속의 정월이냐 하는 것은 부차적일지 모른다. ‘귀향’에 따르는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복합감정이 감동의 핵심인 것이다.
이 감정의 원천은 단지 귀향자의 물질적 성공/실패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탈향과 귀향의 모티프는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친밀성과 싸늘한 이해관계, 유년의 마술적 신비함과 성년의 창백한 현실이 뒤섞이고 음미된 결과,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는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낳는다.
<고향>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알쏭달쏭하다. 20년 만에 창백하게 귀향한 ‘나’의 괴로움일까. 혹은 “괴로움으로 정신이 마비”된 유년 시절의 친구 ‘룬투’의 막연한 희망일까. 룬투는 누구인가.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그것은 오늘도 생활의 압박에 허우적거리는 나, 당신, 우리와 같은 평범한 풀뿌리 민중들이다. 룬투의 말을 들어보자.
“몹시 어렵습니다. 여섯째 아이까지도 거들고 있지만, 그래도 먹고살 수가 없어요. 세상은 또 뒤숭숭하고, … 일정한 규정도 없이 마구 돈만 걷어가고 … 게다가 작황은 나빠만 가고, 농사를 지어서 팔러 가면 세금만 몇 번이고 바쳐야 하고, 본전만 까먹고 들어가죠. 그렇다고 팔지 않자니 썩어버릴 뿐이구요.”
고향. 그런 것이 있다면, 귀향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것은 어떤 ‘낙차’일 것이다.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버렸는데, 추억을 빼고는 변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유일하게 낙천적 밝음을 뿜어내는 존재는 아이들이다. 쉰과 룬투가 그랬듯, 셰이성과 홍얼은 명절의 이례적인 시간 속에서, 종달새처럼 명랑하게 어울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이 세상의 모든 성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한계 상황, 즉 “배 밑바닥”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자주 사로잡힌다. 노동이 이례적으로 정지된 이 명절은, 그런 성인들이 지극히 깊은 상념에 비로소 잠길 수 있는 예외 상태다. 그러나 막연하나마 희망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삶이 아니다.
“배 밑바닥에 철썩철썩 부딪치는 물소리를 들으며, 난 내가 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각했다. 나와 룬투는 결국 이렇게까지 멀어졌지만, 우리의 후대들은 아직도 함께 어울리고 있다. 홍얼은 지금 셰이성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은가? 난 그 애들이 나처럼 다들 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 그들은 마땅히 새로운 생활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아직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생활을!”
고향과 작별하기 위해 귀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귀향형 소설’의 보편적 모티프는 이렇다. 배 밑바닥에 쓰러져 있어도, 희망을 상상하라. 배 밑바닥에 누워 있으니 하늘을 보는 게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