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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30~40년 법관’의 수준 / 석진환

등록 2017-09-26 18:13수정 2017-09-27 09:58

석진환
법조팀장

김명수 대법원장이 26일 취임했다. 지난달 대법원장에 지명된 뒤, 춘천에서 근무하던 그는 관용차가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해 상경하는 장면으로 언론과 국민 앞에 ‘데뷔’를 했다. 어떤 이들은 소탈한 모습을 반겼고, 야당 청문위원들처럼 ‘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당시 모습을 보며 ‘과유불급’이 아닐까 생각했다.

개인적으론 ‘대중교통 상경’보다 다음 장면에 그가 했던 말에 더 관심이 갔다. 서류가방을 들고 걸어서 대법원에 도착한 그는 기자들에게 “저는 31년 5개월 동안 사실심(1·2심) 재판만 해온 사람이다.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인지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방향성이 분명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메시지였다.

‘31년 현장 경험’을 해온 ‘판사 김명수’의 삶은 충분히 믿음직스럽다. 그건 부품을 조립하거나, 만두를 빚어 팔거나,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곁눈질하지 않고 30년 이상 성실하게 한우물을 판 전문가들이 미더운 것과 같은 이유다. 그렇지만 오랜 경력이 곧 기술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수준 높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본다. 최근 ‘전임 대법원장 6년’을 되짚어가며 후배들이 공들여 쓴 기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주 퇴임한 양승태 대법원장은 법관 생활만 42년을 했다. 그 역시 오랜 세월 재판을 했고, 대부분 판사 출신인 대법관들의 재판 경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이들로 구성된 대법원이 지난 6년 동안 내놓은 판결 중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을 만장일치로 파기환송한 것처럼 상식적이지 않은 것도 꽤 많다. 이 중 최악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과거사 배상 관련 판결을 택할 것이다.

2013년 대법원은 독재정권의 학살·의문사·조작간첩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의 길을 참혹할 정도로 틀어막았다. 소멸시효를 진실화해위 결정일로부터 3년으로 못박았고, 그해 말엔 조작간첩 사건의 배상도 재심 무죄 확정일 또는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로 제한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나. 간첩 누명을 쓰고 17년 옥살이를 한 박동운씨는 5년 전 국가가 평생을 망친 배상으로 8억7천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예고 없던 대법원 판결로 이젠 그 이자까지 더해 11억원 가까이 토해내야 할 처지가 됐다. 법적 용어로 ‘부당이득금’이라고 한다. 독재정권이 농협 서기였던 30대 아빠와 세 아이의 인생을 짓밟았고, 30여년 뒤엔 법원이 72세가 된 노인에게 또 국가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박씨는 한 사례일 뿐이다.

2011년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전까지 법원은 과거사 판결 사과와 재심 무죄 판결 등 일련의 ‘역사 바로잡기’를 진행했다. 6년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 1981년 ‘고문당했다’는 박씨의 말을 외면하고 사형을 선고했던 판사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던 것처럼, 박씨에게 2차 폭력을 행사한 대법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달라진 게 있나?

전문적 법률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국가의 무자비한 인권침해에 대한 배상에는 소멸시효가 없다’고 본 유엔의 지침이, 민법 규정을 끌어와 시효를 못박은 대법원 판결보다 훨씬 상식적으로 보인다.

김명수 신임 대법원장이 강조한 ‘판사의 수준’은 결국 소수자와 약자를 배려하고, 판결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가 강조하는 ‘법관 독립’도 이를 보장하려는 최소한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평가는 훗날의 몫이니.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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