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영 영화평론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몇년 전 황현산 선생이 쓴 문장 하나가 눈에 번쩍 띄었다. “생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젊은 비평가를 위한 잡다한 조언’, <21세기 문학> 2014년 봄호)
그의 조언은 최근의 상품화된 인문학 지식을 넘어 ‘부지런해서 이론가 된 게 아니라 게을러서 이론가가 된 비평가들’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내겐 문맥과 무관하게 진지한 혹은 그렇게 보이는 읽고 쓰기의 행위가 비판적 사유의 실천이라고 믿는 관성적 사고에 대한 아픈 지적으로 들린다. 내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근심을 담은 글을 읽고 쓴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진 않는다.
글 읽기와 쓰기가 그러하다면, 영화 보기와 쓰기는 어떠한가. 영화야말로 우리가 종종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보는 유희의 텍스트가 아닌가. 대만 감독 차이밍량은 10여년 전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한 관객의 거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세상을 걱정하는 영화는 상업영화이고,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영화는 예술영화입니다.”
예술가 특유의 수사학적 과장이 있다 해도 이 말은 계속 되새기게 된다. 우리 시대의 많은 대중영화들은 세상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세계의 오염, 인간의 타락, 시스템의 부패 등등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오늘의 대중영화가 애용하는 주제들이 아닌가. 그런 영화를 본 수백만 혹은 천만 관객이 공감하고 공유한 것은 무엇일까.
이젠 대중영화의 클리셰가 된 비판적 언술의 정점 부근에 인간혐오가 놓여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인간이 지구를 지배할 자격도 능력도 잃어버린 것처럼 묘사되는 공상과학영화는 더 이상 드물지 않다. 최근 3편인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 개봉된 <혹성탈출>의 프리퀄시리즈도 그런 사례다. 이 시리즈는 지구인의 우주선이 우연히 도착하게 된 유인원의 행성이 실은 미래의 지구로 밝혀지는 <혹성탈출>(1968)의 전사(前史)를 재구성한다.
나는 이 시리즈를 재미있게 보았고, 관객과 평단의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어째서 오늘의 우리는 인간혐오의 텍스트를 이토록 즐기게 되었는가. 1편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에서부터 인간은 아예 부수적이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밀려나며, 더할 나위 없이 강해지고 똑똑해진 유인원, 특히 불세출의 영웅 시저가 보는 이를 매혹한다.
이 영화를 인간 문명에 대한 진지한 비판으로 읽는 것은 일면적이다. 물론 이 시리즈의 유인원에는 <아바타>(2009)의 외계인이 그러했듯 문명이 학살한 원주민, 나아가 억압받는 소수자 일반의 알레고리 측면이 분명히 있다. 특히 3편의 유인원은 서부의 낙원에 도착한 인디언처럼 묘사된다. 이 인간혐오에는 반인종주의적 전언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인간 문명에 대한 전면적 부정 또한 담겨 있다. 우리는 문명의 온갖 혜택을 전혀 포기하지 않으면서(이 영화의 유인원 캐릭터야말로 첨단 테크놀로지의 산물이다) 문명 비판의 상투구를 애용하고 있지 않은가.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썩었다는 발상은 실은 비판이 아니라 혹시 ‘최종적 해결’을 꿈꾸는 고도의 인종주의와 내면적 연관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비판에의 동의라고 읽은 것이 실은 위험한 클리셰의 또 다른 유희가 아닐까. <혹성탈출> 시리즈는 이런저런 의문이 꼬리를 물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