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세기의 재판’으로 ‘오제이(O. J.) 심슨 사건’을 첫손가락에 꼽는다. 극적인 법정드라마와 전세계의 폭발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미식축구리그(NFL) 흑인 스타플레이어였던 심슨이 1994년 전 부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달아나다 추격전 끝에 체포됐다. 차에서 혈흔이 발견됐고 집에서 피 묻은 장갑이 나왔다. 불리한 증거가 여럿인데도 심슨이 무죄를 선고받은 배경은 인종주의였다. 배심원 12명 중 9명이 흑인이었는데, 이들이 증거를 배제한 채 평결했다는 것이다.
심슨 쪽은 재판이 열리기 전 ‘여론의 법정’에서 이미 완승했다. 심슨 변호인들은 언론에 사건 현장에서 증거 수집에 관여한 백인 경찰이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점을 흘렸다. 사건 배심원이 될 가능성이 많은 엘에이(LA) 거주 흑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정의를 실현하는 법정은 법률의 법정과 여론의 법정으로 나뉜다. 여론의 법정에서는 소송 절차에 관한 규정도 없고 증거 원칙도 철저하지 않다. 여론의 법정은 법정에서처럼 무죄 추정의 원칙이 우선하지 않는다. 법률의 법정에서 진술 거부는 유죄로 추정돼선 안 되지만, 여론의 법정에서 침묵은 사실관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 캔들 코피 지음, 권오창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세기의 재판으로 기록될 이재용 삼성 부회장 재판에서 삼성은 여론의 법정에서 이기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판결을 앞두고 일부 경제지·종합지는 삼성에 우호적인 기사들을 쏟아냈다. ‘정황은 가득, 증거는 부실한 세기의 재판’ ‘예고편만 요란했던 맹탕 안종범 수첩’ 등의 기사가 그 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사건의 본질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라고 단호히 규정했다. 양형을 두고 논란도 있지만, 큰 틀로 보아 삼성은 법률의 법정은 물론 여론의 법정에서도 패배했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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