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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승욱의 증상과 정상] 네가 나라다

등록 2017-08-27 18:29수정 2017-08-27 19:16

이승욱
닛부타의숲·정신분석클리닉 대표

철학자 김상봉은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보수가 없는 이유를 지켜야 할 자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저서 <네가 나라다>에서 말한 내용을 조금 더 빌려 온다. 정치의 영역에서 자아는 개인이 아니라 겨레(또는 국가)라고 한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겨레도 민족도 국가도 없고 오직 가족만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박근혜를 정점으로 해서 그 옆에 이건희-이재용 삼성 일가가 있고 그 밑의 최태민-최순실 가족을 보면 이 나라는 가족이 지배해온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게다가 북쪽에서는 백두혈통 운운하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가족이 반세기 이상을 지배하고 있으니, 한반도에는 남북을 막론하고 국가도 겨레도 없고 오직 가족만 있다는 말은 더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에 근거하면 이 나라에서는 가족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심이 간다. 직업상 흔히 목격하는 가족의 모습을 정리해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어머니를 극복하지 못한 아들들이다. ‘당신에게 어머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이 서른도 훌쩍 넘은 남자들이 ‘큰집’ 또는 ‘결국 내가 돌아갈 곳’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자동적으로 아내는 작은집이 되거나 떠날 곳이 되는 셈이다). 어머니에게 정서가 묶여 사는 남성은 삶에서 수동적이고 무책임하다. 이들은 자신만의 가정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 ‘어머니의 가족’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삶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이런 남자들의 특징은 세상에서 자기 어머니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런 남성을 보기란 꽤 쉽다.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딸들은 ‘비판’이라는 정신활동에 무관심할 때가 많다. 그저 아버지의 정치관, 세계관, 인생관을 답습해서, 그것이 자기 삶의 기준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조차 해본 적도 없다. 이런 여성들은 아버지를 이상화하는 만큼, 남편을 지질한 인간으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세상에 내 아버지 같은 남자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런 여성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든 가족이라면 그 가족도 허상이 아닐까. 비유하자면, 우리는 가족은 가졌을지 몰라도 가족관계는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말이다. 가족이 구성원의 역할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것이라면, 가족관계는 그 역할에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서 서로를 한 개인으로, 각자의 고유성으로 만나려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노벨문학상 작가 헤르타 뮐러는 한때 나치 부역자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죽자 “우환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수치를 말할 수 있는 딸, 어머니의 집착을 허황하다고 말할 수 있는 아들이 되지 못하는 한 이 나라에는 겨레와 국가는커녕 가족도 없을 것이다.

정신분석가로서 필자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닌 정신분석가는 상상할 수가 없다. 정신분석가는 인간 정신의 검열과 억압에 맞서 평생 투쟁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정신분석가가 무정부주의자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래서 김상봉 선생의 ‘네가 나라다’라는 명제가 마음에 든다.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우리 한 명 한 명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명 한 명이 각각 하나의 완성된 나라라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한 검열과 억압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맺는 관계, 그에 기반한 가족, 사회, 국가라면, 우리는 모두 각자 완성된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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