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이후 소수 민족·인종, 여성, 동성애자 등이 독자적인 정체성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한다. 트럼프는 거꾸로 이들에게 맞서 백인 남성 중심의 정치를 강화하려 한다. 이는 전통적인 미국 공화당 우파의 노선과 일맥상통하지만, 트럼프는 그보다 더 거칠고 포퓰리즘 성향이 강하다.
트럼프 정부가 실제 고립주의로 흐를 가능성은 작다. 패권국의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의 희생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한 미국’을 내세운 트럼프는 힘의 과시를 좋아하는데다 대외정책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는 성향도 다분해, 선택된 몇몇 국제 사안에서는 더 개입적으로 될 수 있다.
임기 중에 탄핵당할 가능성까지 거론되긴 하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엄연히 세계 최고 권력자다. 그는 최상위 기득권층이면서도 이른바 엘리트 정치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과연 ‘트럼프의 미국’은 세계사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 걸까?
지난해 11월 대선의 전체 득표에서 트럼프는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보다 290만표 가까이 뒤졌다. 무려 투표자의 2.1%에 이르는 규모다. 그러나 경합주에서 대부분 이겨 승리를 낚아챘다. 크게 밀리는 주는 진작 포기하고 승리에 꼭 필요한 주에 집중하는 현명한 유세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 산업지대인 중서부의 오하이오주가 그 가운데 하나다. 이 주는 1964년 이후 치러진 14차례의 대선에서 모두 승자가 대통령이 된 유일한 곳이다. 1160만명의 인구는 백인(83%)과 흑인(12%)이 대부분이다. 그 외 아시아계(2%)가 조금 있고 중남미계는 거의 없다. 2012년과 2008년에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각각 3.0%포인트, 4.5%포인트 차이로 이겼으나 지난해엔 트럼프가 8.1%포인트 앞섰다. 트럼프는 2012년 공화당 후보보다 18만표를 더 얻었으나 클린턴은 43만표나 잃었다.
이전 선거와 비교해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인종별 투표율이다. 흑인 투표율은 2004년 선거부터 백인을 추월해 2012년에는 10% 이상 높았으나 2016년 선거에선 다시 같아졌다. 트럼프의 백인 지지율은 60%에 못 미치지만 클린턴의 흑인 지지율이 90%에 가까웠던 점을 고려하면, 이런 투표율 차이는 선거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한마디로 클린턴은 민주당에 우호적인 인구집단을 투표장에 제대로 불러내지 못한 반면 트럼프는 백인들의 표를 결집해 이겼다.
트럼프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 집중한다. 정체성은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을 말한다. 서구에서 생겨 세계로 퍼진 근대국가에서 정체성의 기본은 네이션(nation)이다. 그래서 근대국가를 네이션스테이트(nation-state, 보통 국민국가라고 함)로 표현한다. 네이션은 민족·국민·국가라는 뜻을 모두 갖는다. 그래서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민족주의, 국민주의, 국가주의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네이션스테이트는 형성을 주도한 세력이 있다. 대개 주류 민족·인종 집단의 남성이다. 곧 이들이 네이션스테이트의 정체성을 만든 사람이다. 그런데 2차대전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이들에게 눌려 있던 소수 민족·인종, 여성, 동성애자 등이 독자적인 정체성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한다. 정체성 정치라고 하면 통상 이들과 관련된 정치적 움직임을 가리킨다. 트럼프는 거꾸로 이들에게 맞서 백인 남성 중심의 정치를 강화하려 한다. 이는 전통적인 미국 공화당 우파의 노선과 일맥상통하지만, 트럼프는 그보다 더 거칠고 포퓰리즘 성향이 강하다. 트럼프는 선거 때 기존 공화당 정치를 엘리트주의로 몰아붙였으며, 지금도 공화당 주류 쪽과 수시로 갈등한다.
정체성 정치의 영향은 대외정책에도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초강국인 미국의 대외정책 기조는 크게 국제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국제주의는 정체성의 기준을 국제적 보편주의와 국제협력에 둔다. 국제화한 엘리트를 대변하는 경향이 강하며, 세계화 시대에는 일정 부분 진보적인 가치를 확산하는 역할을 한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한 신자유주의도 국제주의와 어느 정도 상응한다. 국제주의는 2차대전 이후 민주당의 주류 노선이기도 하다.
반면 제국주의는 미국의 뜻을 다른 나라에 강요한다. 공화당 우파가 대체로 이에 해당하며,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 조지 부시 대통령과 네오콘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민주당에도 지지자가 상당수 있다. 네오콘은 이라크 침공 등을 통한 중동 재편 시도를 자유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제국주의자들 역시 국제화한 엘리트가 중심이라는 점에서 국제주의와 공통점이 있다.
민족주의(또는 국가주의, 국민주의)는 국제주의와 제국주의에 모두 거리를 두고 자민족(미국, 미국인)의 정체성과 이익을 앞세운다. 지구촌 전체 질서를 생각하며 행동하는 데 익숙한 엘리트보다는 대중들의 정서를 중시한다. 미국의 대중, 특히 중하층 백인 남성 집단은 양극화 등 세계화의 부작용이 커지면서 민족주의 경향이 강해졌다. 트럼프는 이들로부터 동력을 공급받고 이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키운다. 트럼프 정권의 한 축을 이루는 대안우파(alt-right)는 국제주의와 제국주의를 주도해온 기존 주류 정치인들을 모두 글로벌리스트라고 비난한다. 그래서 이들을 고립주의자로 보기도 하지만 트럼프 정부가 실제 고립주의로 흐를 가능성은 작다. 패권국의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의 희생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한 미국’을 내세운 트럼프는 힘의 과시를 좋아하는데다 대외정책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는 성향도 다분해, 선택된 몇몇 국제 사안에서는 더 개입적으로 될 수 있다.
주류 민족·인종 중심의 정체성 정치는 유럽과 일본 등 다른 선진국에서도 강화되는 추세다. 여기에는 공통된 배경이 있다. 우선 실마리를 찾기 힘든 문제들이 장기화하고 있다. 커지는 빈부·지역 격차, 갈수록 복잡해지는 이민·난민 문제, 저성장 추세의 고착, 저출산 고령화, 저강도 국제갈등의 확산 등이 그것이다. 주류 정치세력이 대중과 괴리되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정권을 바꿔봐야 새로운 게 없다는 인식이 갈수록 커진다. 자유민주주의의 피로 현상이라고도 할 만하다. 주류 민족·인종 집단은 이에 좌절하고, 늘어나는 스트레스를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정치에 투사한다. 이런 경향은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더 심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중간국이나 상대적 약소국의 경우는 양상이 다르다. 스스로 제국주의가 될 역량이 없으므로, (초)강국에 기생하는 형태의 소제국주의나 유사 제국주의가 나타난다. 과거 소중화를 자처했던 노론 집권층의 행태가 이에 해당하며, 미국을 절대시하는 종미파가 이를 계승하고 있다. 국제주의는 균형외교로 표출된다. 19세기 말 고종 시기와 노무현 대통령의 대외정책 노선이 이에 상응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비슷한 길로 접어들고 있다. 민족주의는 우리나라에서 여러 형태를 갖는다. 일제에 맞선 독립투쟁 세력의 공통분모가 민족주의였던 반면 수구·독재를 강화한 1860년대의 대원군, 집권 후기의 박정희 대통령의 언행 또한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다.
소국이지만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유사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과대망상적인 나라도 있다. 북한, 쿠바, 리비아 등이 그런 사례다. 현실의 힘이 따르지 않으므로 이들의 실패는 시간문제다. 리비아는 붕괴했고, 쿠바는 스스로 한계를 인정했다. 북한 또한 둘 가운데 하나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국민국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정치세력이든 일정하게 민족주의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기득권 세력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돼선 안 되며, 특히 강국의 민족주의는 대외적으로 아주 위험하다. 민족주의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히틀러 정권이 2차대전을 일으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주류 민족·인종 집단의 정체성 정치는 위험하다. 국내 소수파에 대한 차별·억압과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주된 내용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 스스로 이를 견제하지 못한다면 지구촌의 민주주의는 큰 후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물론 권력 분립 체제가 잘 갖춰진 미국에서 트럼프의 정체성 정치가 히틀러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안은 무엇인가? 국제주의를 중심에 두고, 국가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수준 이하로 민족주의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나라 안과 나라 밖 모두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미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지구촌의 모든 나라에 해당하는 얘기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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