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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일제강점기라는 유혹 / 허문영

등록 2017-08-11 18:36수정 2017-08-11 21:04

허문영
영화평론가

최근 한국영화에서 일제강점기는 애용되는 소재의 수준을 넘어 하나의 장르가 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편수가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암살> <밀정> <아가씨> <군함도> 등 최근 대작들 다수가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대륙활극’ 혹은 ‘만주웨스턴’으로 불리던 한국영화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삼고, 미국 서부의 황야를 만주벌판으로, 서부사나이를 독립군으로 번안한 한국적 서부극들이며, <무숙자>(1968, 신상옥), <황야의 독수리>(1969, 임권택), <쇠사슬을 끊어라>(1971, 이만희) 등이 그런 영화였다. 전통적인 영웅서사의 호소력에다, 사내들이 지평선을 향해 광야를 질주하는, 한국의 지형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스펙터클(주로 뚝섬 부근에서 촬영되긴 했지만)이 만주웨스턴의 매력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영화들은 두 가지 이유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에 이끌리는 것 같다. 하나는 물론 여전히 그 시대가 영웅서사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한쪽에 명백하고 잔혹하며 거대한 악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야기꾼의 발견을 기다리는, 부서질 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비극적 영웅들이 숨어 있다. 다른 하나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으로 세트의 유혹, 혹은 무대 장치의 유혹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오늘의 일제강점기 영화는 만주웨스턴의 유사 황야를 거대하고 화려한 세트로 대체했다. 1930년대 경성이 무대인 <모던 보이>(2008)를 만든 정지우 감독은 이런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요즘 한국의 주거공간과 일반 건축물은 다양한 앵글과 역동적인 구도를 만들어내기엔 너무 단조롭다. 일제강점기 영화는 예산만 있다면 갖가지 구조의 집과 건축물의 세트를 시도할 수 있다. 전통 한옥, 정교한 일본식 가옥, 액션 연출에 적합한 중국식 객잔, 화려한 유럽식 건축물이 그 시대에 혼재했다고 가정한다면, 이 다양한 공간들은 카메라를 신명나게 할 수 있다.”

<암살>의 갖가지 스타일의 건축물이 뒤섞인 경성 거리, <밀정>의 유럽 박물관과도 같은 총독부 건물, <아가씨>의 여러 겹의 문이 공간의 심도를 극대화하는 대저택, <군함도>의 삭막하고 위압적인 인공 도시를 떠올리면 그의 말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예외도 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와 <박열>은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삼았지만, 이 두 가지 유혹과 무관하다. 두 작품은 상대적으로 저예산이며,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한 인물을 중심에 둔 영화적 초상화를 시도한다.

윤동주가 주인공인 <동주>는 인물의 내면 풍경과 시대의 공기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가 겪은 사건이나 일제의 잔학상이 아니라, 어두운 표정으로 맑은 언어를 읊조리는 그의 처연한 얼굴, 흑백으로 촬영된 차가운 거리 풍경의 촉감이 남는다. 실존 무정부주의자가 주인공인 <박열>은 인물의 영화이며 무엇보다 태도의 영화이다.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의 많은 말들이 쏟아지지만, 보는 이를 사로잡는 건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들의 방약무인한 태도다. “일본에서 가장 버릇없는 피고가 되겠다”고 외치고, 사형선고가 내려진 재판이 끝나자 “어이, 수고했다”고 판사를 격려하는 박열과 가네코의 밑도 끝도 없는 명랑함은 거의 어리둥절할 정도다.

<박열>은 엄숙하고 심각하고 신경증에 빠진 어른을 비웃는 버릇없고 유쾌하며 무엇보다 자유로운 젊은이, 혹은 꼰대선생을 조롱하는 명민한 문제아의 소란에 관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이준익의 남다른 선택이 더 훌륭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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