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베를린의 기억 17년 / 박병수

등록 2017-07-09 19:23수정 2017-07-09 19:32

박병수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역대 대통령들이 남북관계의 기본 구상을 밝히는 장소로 독일을 선호하는 데는 분단을 극복한 독일 통일의 상징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연설에 앞서 17년 전인 2000년 3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연설했고, 2014년 3월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옛 동독 지역인 드레스덴에서 연설했다.

연설의 성과는 달랐다. 김 전 대통령은 석 달 뒤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했으며, 유례없는 남북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박 전 대통령의 연설은 북한의 “반민족·반통일 정책”이라는 반발을 불렀고, 남북관계는 최악이 됐다. 두 연설 모두 큰 틀에서 남북의 교류와 협력을 언급했지만, 전반을 관통하는 기조나 지향점은 달랐고 그게 성패를 갈랐다. 북한이 김 전 대통령의 연설에 반응한 것은 그들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줬기 때문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문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연설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한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이번 베를린 연설에서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진하지 않을 것이다. 통일은 평화가 정착되면 언젠가 남북 간의 합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이라며 ‘선 평화 후 통일’ 원칙을 제시했다. 17년 전 김 전 대통령이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북한의 안전을 보장한다”며 당시 햇볕정책을 흡수통일 의도로 의심하던 북한을 안심시키려 했던 대목을 상기시킨다.

남북 경협 문제도 조금 차이가 나지만 큰 틀에선 김 전 대통령의 제안과 다를 바 없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언급하며 남북 철도·가스관 연결, 10·4 선언의 합의사항 이행을 거론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며 대북 경제지원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곳곳에서 닮은꼴이 느껴지지만, 이번엔 김 전 대통령 때와 같은 기대감이 없다. 무엇보다 상황이 17년의 세월만큼이나 크게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이 과거 김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혹한 건 아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남북 간에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는 등 민간 협력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고, 베를린 연설 직전엔 박지원-송호경의 싱가포르 비밀접촉도 있었다. 반면 지금 정부는 최악의 남북관계를 물려받았다. 남북 간 모든 연결은 끊겼고, 17년 전 제네바 합의 등으로 봉합됐던 북핵 위협은 당장 한반도를 윽박지르는 먹구름이 돼 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니다. 문 대통령의 발언에서 이런 현실을 돌려놓으려는 비전을 찾기 어려운 건 유감이다. 문 대통령의 남북 경협은 “북핵문제가 진전되고 적절한 여건이 조성되면”이란 단서로 옥죄여 있다. 북핵문제가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이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엔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병행 추진’이 원칙이었다. 남북관계 개선이 북핵문제 해결을 이끌고 북핵문제 개선이 다시 남북관계를 추동한다는 선순환 구도가 사라진 건 상상력 부족이다.

문 대통령은 북핵문제와 관련해 “제재는 외교적 수단”이며, 비핵화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달성한다고 했다. 그러나 제재만으로 북한을 대화로 나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비약이다. 제재는 자동으로 대화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이미 지난 정부 시절 입증된 사안 아닌가. 제재와 대화 둘 사이의 간극을 이어줄 사다리가 필요하다. 그걸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선순환 말고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suh@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