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최근엔 극장에서 개봉되는 영화만 해도 1년에 1천편이 넘지만(2016년, 1520편), 적지 않은 영화들이 수입이 되고도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상당수가 브이오디(VOD)로 직행한다. 극장에 걸어봤자 개봉 비용조차 건지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본래 저잣거리 태생이니 시장논리를 개탄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개중에는 그렇게 한구석에 묻혀 있기 아까운 보석들이 있다. 켈리 라이카트의 <어떤 여자들>(2016)도 그런 영화다. <사이트 앤 사운드> <빌리지 보이스> 등 적지 않은 영화 관련 매체들이 2016년 최고의 영화 명단에 올린 이 영화는 소리소문 없이 브이오디 목록에 올라 있다. 라이카트의 팬으로서 그녀의 이 아름다운 작품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라이카트는 1994년 <리버 오브 그래스>로 데뷔한 이래 각본과 편집까지 겸하며 지금까지 7편의 장편을 만들었다. 한국에 정식 개봉된 작품은 한 편도 없지만, “초저예산으로 장르의 창의적인 변주를 통해 영화전문가들과 장르영화광들의 마음을 동시에 움직인다”(토드 매카시), “필름 시퀀스와 부조리 코미디의 화술을 결합하는 독창적인 재능”(조너선 로젠봄) 등의 찬사를 들어온, 미국 독립영화계의 여제라 부를 만한 인물이다. 나는 라이카트가 2010년에 만든 기묘한 서부극 <믹의 지름길>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미국 영화들, 특히 서부극의 특별한 점 가운데 하나가 풍경의 침묵을 응시하는 능력에 있다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아름다운 풍광으로서도 아니고 가혹한 자연으로서도 아닌, 그저 거기에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서사를 왜소하게 만드는 견고하고도 과묵한 풍경을, 다른 문화권의 영화에선 만나기 힘들었다. 라이카트는 주로 할리우드 액션영화가 장르적 관습의 보급창처럼 전용해온 서부극을 21세기에 다시 만들면서, 미국 서부의 황량한 풍경을 약속도 요구도 없는 세계의 무표정으로 번안했다. 그의 인물들에게 주어진 것은 사건과 해결 가능성이 아니라 그저 세계의 침묵을 견디며 걷고 또 걷는 여정일 뿐이다. <믹의 지름길>은 21세기의 가장 창의적인 서부극 명단에 들 자격이 있다. <어떤 여자들>에는 미국 서북부의 몬태나 지역에 사는 세 여인의 이야기가 나란히 이어진다. 법률적 도움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가련하고도 거추장스러운 사내를 상대해야 하는 평범한 변호사 로라, 한적한 시골에 살고 싶어 이주를 준비하지만 남편 및 딸과의 정서적 유대가 희미해진 지나, 홀로 말을 돌보며 살다 한 여선생을 사랑하게 되지만 응답을 듣지 못하는 외로운 소녀가 살아간다. 그들에게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나지만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세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차라리 그들이 살아가는 장소다. 카메라는 종종 인물을 지나쳐 그 장소의 온도를 느끼려는 듯, 몬태나의 스산한 풍경 앞에 멈춰 서서 우두커니 바라본다. 초봄이 배경이지만, 눈은 아직 녹지 않았고 햇살은 ‘모기 날개’만큼밖에 비치지 않는다. 인물들은 손을 내밀어 누군가를 잡으려 하지만 맞잡는 손은 없으며, 그들 주변을 바닥 모를 무심함의 공기가 감싼다. 인물들은 접촉의 희망을 잃어가지만, 풍경은 거의 만져질 듯 생생하게 묘사돼, 영화를 보는 동안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그 장소를 살아가는 듯한 느낌에 빠진다.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듣고 만지게 되는 것이다. 희귀한 체험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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