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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덕기자 덕질기 2] 춤이라는 식물 / 석진희

등록 2017-06-28 18:38수정 2017-06-29 11:14

석진희
디지털뉴스팀 기자

춤은 식물성이다. 탱고의 관능미도, 발레의 고아함도 몸을 식물처럼 써야 피어난다.

하체를 아래로, 상체를 위로 당겨 몸을 팽팽하게 만들 때 춤추는 수직의 몸은 식물을 닮았다. 잎과 줄기는 빛 쪽으로, 뿌리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식물의 굴광성 그대로다. 춤을 시작한 뒤론 춤추지 않을 때 못 했던 상상을 한다. 발바닥을 땅에 더 깊이 담그고, 정수리는 빛 쪽으로 조금만 더.

식물이 포기하지 않는 건 빛이다. 탱고가 포기하지 않는 빛은, 가슴이다. 탱고의 핵심 중 하나인 ‘상체와 하체의 분리’가 내겐 그렇게 해석된다. 상·하체 분리는 허리를 기준으로 상체의 방향과 하체의 방향을 달리하는 것. 이를테면 골반이 측면으로 돌아가 있을 때도 상체는 최대한 정면을 향한다.

위쪽으론 더는 필 곳이 없다는 듯 옆으로 넘어가는 꽃잎. 발레리나는 몸을 꺾어서 젖히지 않고 상한을 넘어가듯 젖힌다. 율리야 아르테미예바(Yulia Artemyeva) 제공
위쪽으론 더는 필 곳이 없다는 듯 옆으로 넘어가는 꽃잎. 발레리나는 몸을 꺾어서 젖히지 않고 상한을 넘어가듯 젖힌다. 율리야 아르테미예바(Yulia Artemyeva) 제공
상·하체를 분리하면 몸을 왼쪽 상·하부와 오른쪽 상·하부 이렇게 네 구역으로 나눠 입체적으로 쓸 수 있다. 그리고 이 쓰임의 목적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 상대 쪽으로 가슴을 두는 데 있다. 탱고를 추는 두 사람은 빛을 향해 자라는 식물처럼 서로의 가슴을 오직 향한다. 상·하체 분리가 잘되는 이와 춤춰보면 그의 상체는 미동이 거의 없고 무척 고요하다. 나무같이. 다리의 사정에 가슴이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발레의 비밀은 꽃식물에 있다. 그리고 나는 몸을 꽃잎처럼 펼치고 싶어서 가장 먼저 내 몸이 꽃이라는 생각을 버렸다.

다음 동작은 발레의 기본이 되는 팔 자세. 꽃망울처럼, 두 팔을 둥근 모양으로 늘어뜨린다(앙바). 드디어 벌어지듯, 팔을 들어올려 손을 갈비뼈 높이까지(앙아방). 개화처럼, 어깨 옆으로 두 팔을 길게 편다(아라스공드). 이제 만개, 두 팔을 머리 위로 높이(앙오). 그런 다음 허리를 뒤로 젖혀 상체를 활처럼 휘게 한다(캉브레). 활짝 핀 꽃이 자신의 최고 높이를 찍고 더는 갈 곳이 없어 옆으로 넘어가듯. 허리는 꺾지 않고 미는 것이다. 몸에 대한 상상과 언어를 바꾸는 것만으로 몸짓이 달라진다.

춤의 가장 식물적인 모습은 역시 기다림 같다. 탱고 스튜디오에서 “걸으세요” 다음으로 많이 듣는 말이 “기다리세요”다. 즉흥 댄스인 탱고는 외운 대로 해버리면 안 된다. 그건 상대방이 하는 말을 기다려서 듣지 않고 내 말만 하는 것과 같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다. 체리 씨앗은 100년을 기다리기도 한다.”(호프 자런 <랩걸>) 춤을 추면 저절로 기다림 수업을 받는다. 어차피 오늘이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날이며, 남은 모든 날은 춤이 나아질 날이라.

ninano@hani.co.kr 사진 율리야 아르테미예바(Yulia Artemye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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