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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몽롱한 말, 집요한 말 / 고명섭

등록 2017-06-27 17:50수정 2017-06-27 19:02

고명섭
논설위원

김훈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의 말’에 이런 말이 나온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작가의 ‘말에 대한 불신’은 깊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다.” 병자호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난 앞에서 조정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싸웠다. 작가는 쓴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말과 글, 그리고 말과 글을 주무르는 사람들에 대한 지독한 불신은 소설 전편에 넘실거린다. 작가는 말과 글의 맞은편에 ‘고통받는 자들’, 곧 민중의 삶을 놓는다. 그러나 말과 글이 민중의 고통받는 삶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일까.

10년이 지나 작가는 <남한산성> 100쇄 기념판에 장문의 ‘못다 한 말’을 실었다. 거기서 작가는 퇴임한 전임 대통령 김대중을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를 복기해 놓았다. “김 작가는 김상헌과 최명길, 둘 중에서 어느 편이시오?” “작가는 아무 편도 아닙니다.” “나는 최명길을 긍정하오. 이건 김상헌을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오.” 작가는 김대중이 최명길을 조선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인 중의 한명이라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불굴의 민주투사 김대중이 주화파 최명길에 대해서 그토록 긍정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작가가 이 일화를 굳이 상세히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말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말이 아니고, 말마다 값어치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못다 한 말’은 10년 뒤에 쓰는 이 소설에 대한 사후 교정 혹은 보충으로 들린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로 380년이 흘렀지만 척화파와 주화파의 싸움은 일그러진 형태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한다면 한·미 연합군사훈련 축소에 대해 미국과 논의할 수 있다.” “사드 때문에 동맹이 깨진다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 대통령 특별보좌관이 한 발언을 놓고 수구보수 세력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수구언론은 “대통령 외교특보의 ‘워싱턴 발언’ 파문”이라고 쓰고 ‘경솔한 입’을 ‘경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구정당의 대표는 “대통령 특보가 국민 세금을 받아 워싱턴에 가서는 한·미 간에 이간질에 가까운 위험한 말을 쏟아냈다”고 했다. 이 당 대표의 그다음 말은 이 소동의 본질을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은 좌파세력과 북에 경도된 자주파들의 논리에 잘못 이끌려 지난 60년간 구축한 한미동맹에 균열을 일으키는 실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북한과 화해하려는 일체의 움직임에 쐐기를 박겠다는 것이 수구세력의 본심이다.

100쇄 출간 기념 인터뷰를 하고 있는 <남한산성> 작가 김훈.
100쇄 출간 기념 인터뷰를 하고 있는 <남한산성> 작가 김훈.
김훈은 <남한산성> 100쇄 출간 인터뷰에서 ‘북한이 주적이냐 아니냐’ 따위를 묻는 말을 ‘몽롱하고 관념적인 말’이라고 했는데, 수구세력의 문정인 성토야말로 그런 말의 전형이다. 그러나 ‘몽롱한 말’은 몽롱한 말로 그치지 않는다. 몽롱한 말은 뒤집어보면 집요한 말이고 탐욕에 찬 말이다. 남과 북의 대치 위에 구축한 수구 기득권 체제는 북한이 남한에 주적으로, 위협으로, 공포로 남아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외부의 공포를 이용해 내부를 잡도리하고 현재의 지위와 권세를 영생토록 누리는 것, 그것이 수구세력의 말이 노리는 목표다. 이 말의 위력에 짓눌려 남북 민중의 고통은 늘어지고 깊어졌다. 지금 벌어지는 말들의 싸움은 한반도 구성원 전체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가는 말과, 허리가 끊어진 반도의 고통 위에서 기득권의 성을 쌓고 지키는 말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말은 삶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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